직장 생활 할 때, 동료 여직원이 별명을 지어준 적 있다. 옴므파탈(Homme fatale). 이유를 몰랐던 나는 그저 내가 그만큼 치명적으로 섹시한가 보다 하고 멋대로 헛물 켰었다. 나중에 사연을 알고 보니 이랬다. 프린터나 팩스 등 회사 집기를 내가 손댈 때마다 고장이 나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그 여직원이 현장을 목격하곤 했던 것이다. 나 스스로도 내게 무슨 마가 쓰인 건 아닌가 당혹스러웠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가 보고 있었다는 건 의식하지 못했었다. 그걸 알고 나서 괜히 창피하고 무안했다. 기계만 대하면 호흡이 가빠지고, 늘 허둥대면서 야무지게 움직이지 못하는 손놀림은 어릴 적부터 콤플렉스이긴 했다. 무슨 장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경험이 있어서일 터인데, 자세한 원인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마뜩잖은 일이다.
때론, 기계작동의 문제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말버릇에 대해서도 그런 자의식이 발동할 때가 있다. 섬세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빠른 속단으로 넘겨짚거나, 상대 입장보다 내 상황에 대한 고려가 앞서거나 해서 어딘가 탈이 나고 오해가 발생하는 상황. 옴므파탈이라 불러준 그 동료 덕분에 고장난 팩스 앞에서 그 모든 ‘고장’에 대한 자기점검을 행한 적 있었다. 그녀에게 고마웠다. 진짜 많이 고장 나 있는 건 팩스도 복사기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는 점에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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