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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된 여행… 캐리어는 이제 패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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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된 여행… 캐리어는 이제 패션이다

입력
2015.07.2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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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 등 교통수단 변화 따라 트렁크서 바퀴 달린 가방으로

여행지 문화체험 활동 많아지며 정장까지 넣을 수 있는 큰 가방 선호

스티커·방수커버·네임택 등 캐리어 부가 상품시장도 급성장

소설가 헤밍웨이를 위해 ‘스페셜 오더’로 제작된 루이 비통의 1920년대 트렁크. 루이비통 제공
소설가 헤밍웨이를 위해 ‘스페셜 오더’로 제작된 루이 비통의 1920년대 트렁크. 루이비통 제공

1956년 프랑스 파리 리츠호텔. 58세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하던 호텔 주인 샤를 리츠가 불현듯 묻는다. “1930년 호텔 지하 창고에 맡겨두고 간 여행용 트렁크가 아직 그대로 있다는 걸 아십니까?” 헤밍웨이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퍼뜩 루이 비통이 1920년대 자신을 위해 트렁크를 특별 제작해 줬던 일이 떠올랐다. 가방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하는 헤밍웨이를 위해 리츠는 트렁크를 사무실로 가지고 왔다. 낡은 여행가방 안에는 옷가지, 영수증, 메모, 낚시 및 사냥 용품, 스키 장비 등 시시껄렁한 젊음의 추억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 바로 ‘그 공책들’이 있었다.

“이것들이 여기 있었구먼! 결국 찾았어!” 가난했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오만했던 젊은 작가 헤밍웨이의 파리 시절이 공책 안에는 빼곡히 담겨 있었다. 단골 카페에 앉아 담배를 피워대며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20대의 파리 생활과 그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가 자살 직전까지 고치고 또 고치며 매달렸던 회고록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의 초고가 됐다. 일상에서의 탈주로서 여행은 언제나 아름답다. 하지만 때때로 나의 여행가방은 당신의 여행보다 더 아름답다.

트렁크에서 네 바퀴까지… 여행가방의 역사

여행의 즐거움을 구성하는 8할은 떠나기 전의 설렘이다. 나머지 2할이 돌아온 후의 아련한 추억. 그러니까 여행 그 자체는 ‘비포’와 ‘애프터’를 위한 계기에 지나지 않는 셈인지도 모른다. 공항패션이 늘 떠나기 직전의 모습인 이유다.

떠남의 설렘과 동의어인 여행가방의 역사는 스티머 트렁크(steamer trunk)가 시대를 풍미한 19세기에 시작된다. 그 이전에도 트렁크는 존재했으나, 층층이 쌓아놓는 짐상자에서 배의 침대칸 밑에 쏙 들어가는 납작한 여행가방으로 트렁크의 형태가 변화한 것은 증기선이 보편화한 19세기. 루이 비통이 탄생한 시기다.

이 브랜드를 찬미하든 폄하하든, 트렁크의 역사는 곧 루이 비통의 역사다. 여행가방이 가구에서 가방으로 변모하는 19세기에 목공소집 어린 아들 루이 비통은 파리로 올라가 귀족들의 짐을 꾸려주던 일을 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귀족부인들의 긴 드레스들이 구겨지지 않도록 짐을 잘 꾸렸다. 목수의 아들답게 근사하고도 실용적인 나무 트렁크를 잘 만들었던 것이 비결이다.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유제니 왕후의 총애를 받아 최초의 왕실 전담 여행가방 제조자로 임명된 루이 비통은 1854년 파리에 첫 매장을 오픈하고, 그것이 루이 비통 브랜드의 출발이 되었다. 1800년대 중반만 해도 여행이란 부유층의 전유물이어서 트렁크의 초기 역사가 럭셔리로 시작한 것은 불가피했다.

철도 시대의 도래로 여행가방은 기차의 짐칸에 쉽게 올려놓을 수 있도록 손잡이가 달린 길고 평평한 수트케이스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1930년대 상업비행의 시대가 열리면서 수트케이스는 더욱 폭발적으로 수요가 증가한다. 성서 속 괴력의 주인공 삼손에서 이름을 따온 샘소나이트를 위시해 ‘더 가볍지만 더 튼튼한 가방’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독일 여행가방 리모와가 이 시기 시장을 선도, 아직까지도 왕좌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본체에 홈이 패인 ‘그루브 디자인’이 상징인 리모와가 1950년대 최초로 선보인 알루미늄 여행가방은 디자인마저 그 시절 것을 고수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꽃보다 할배’의 이서진이 들고 다녀 폭발적으로 인기가 높아졌다.

서구에서 해외여행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이래 여행가방의 사명은 휴대성과 편의성으로 변모, 바퀴 달린 여행가방이 마침내 등장한다. 1970년 미국 가방제조업자 버나드 새도우는 공항에서 짐꾼들이 사용하는 바퀴수레를 보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가 ‘롤링 러기지’라는 이름으로 바퀴 달린 여행가방을 만들고 특허 등록한 여행가방은 가로로 눕혀서 줄로 끌고 다니던 형태. 여행가방이 세로로 직립해 조절 가능한 길이의 핸들을 갖추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두 바퀴의 기다란 가방을 기울여 핸들로 끌고 다니는 오늘날의 상징적 이미지는 여행산업을 혁명적으로 뒤바꾼 미국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의 파일럿 밥 플래스가 고안한 것이다. 최근의 여행가방은 두 바퀴에서 네 바퀴로, 위치추적장치 등 각종 첨단기기를 내장한 형태로 또 한번 그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요즘 가장 갖고 싶은 여행가방으로 꼽히는 리모와의 스티커 튜닝 수트케이스. 리모와 제공
요즘 가장 갖고 싶은 여행가방으로 꼽히는 리모와의 스티커 튜닝 수트케이스. 리모와 제공

여행의 기술은 여행가방에 달렸다

오로지 완력만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했던 네모난 상자가 네 바퀴를 달게 된 이후, 여행가방은 점점 커지는 확장일로의 추세에 있다. 세웠을 때의 높이를 기준으로 20인치가 기내 반입이 가능한 캐리온 사이즈의 마지노선. 24, 28, 32인치 가방이 수하물용인데, 요즘은 24인치에서 28인치로 대세가 옮겨가고 있다. 단벌로 버티며 온종일 관광지를 돌아다니던 극기체험 식의 여행 패턴에서 다양한 현지 문화 체험 위주로 여행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식당이나 바에서는 세미 정장, 휴양지에서는 캐주얼 등으로 드레스코드를 맞추고, 이에 따라 신발도 여러 켤레 준비해야 하는 등 싸가야 할 짐이 많다. ‘쇼핑 여행’이 따로 있을 정도로 쇼핑 또한 중요한 여행의 목적이다 보니 여분의 공간을 또 마련해야 한다. 더 많은 짐을 넣을 수 있는 더 가벼운 가방은 여행가방의 시대적 사명이다.

요즘은 직물로 제작된 소프트 타입보다는 견고한 하드케이스가 더 인기가 많다. 기계식 잠금장치보다 지퍼형이 무게도 가볍고 더 많은 짐을 욱여넣을 수 있어 하드케이스에 지퍼 달린 디자인이 압도적이다. 항공기의 수하물 무게 제한으로 인한 여행가방의 본질적 고민은 리모와가 최초로 도입한 폴리카보네이트가 해결했다. 항공기 창문이나 방탄차량에 사용되는 신소재로, 무게는 직물만큼이나 가볍고 가격은 알루미늄보다 훨씬 싸지만 내충격성은 강화유리보다 150배, 판유리보다 200배 강하다.

리모와 가방이 독일 고급 자동차처럼 공학적이고 견고한 느낌으로 당장이라도 ‘007’로 변신할 수 있을 것 같은 ‘간지’를 풍기며 ‘남심’을 유혹한다면,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인 오그램 가방은 소녀감성으로 가득하다. 마음에 드는 여행가방이 없어 직접 제작한 미대생(오은영 대표)의 독특한 가방이 입소문을 타면서 2008년 브랜드로 탄생했다. 멀리서도 수하물 수취대 위의 내 가방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디자인된 오그램 가방은 걸그룹 멤버의 공항 패션에서 자주 포착되면서 지난해부터 급격히 인기가 높아졌다. 오그램의 김용겸 실장은 “가방만 봐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남과 다른 특별한 캐리어를 원하는 분들이 오그램의 감성적 디자인에 반응하는 것 같다”며 “여행이 삶의 일부가 되면서 캐리어가 여행용품에서 패션용품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녀감성의 오그램 수트케이스(아래)와 사이드 백. 오그램 제공
소녀감성의 오그램 수트케이스(아래)와 사이드 백. 오그램 제공
소녀감성의 오그램 수트케이스. 오그램 제공
소녀감성의 오그램 수트케이스. 오그램 제공

나만의 특별한 여행가방으로 튜닝

애지중지해야 하는 패션아이템으로서 여행가방을 예쁘게 꾸미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가방이 깨지거나 터져서 내용물이 다 쏟아져버리는 비상사태에 대비한다는 실용적 목적에 더해 소중한 가방을 스크래치로부터 보호해야 할 필요도 있다. 400만~500만원대에 이르는 루이 비통 캐리어는 남의 나라 먼 얘기라 쳐도 튼튼한 본체와 부드러운 코너링으로 유명한 리모와 알루미늄 가방이 100만원이 넘고, 샘소나이트 같은 대중적 브랜드의 가방도 수십 만원씩 한다. 새 가방도 해외여행 한번이면 스크래치 가득한 헌 가방이 되는 ‘슬픈 기적’. 그래서 등장한 것이 캐리어 커버와 보호벨트다. 스크래치 부분에 붙이도록 고안된 세계 각국의 상징물이 그려진 스티커를 여기저기 붙여 꾸미는 ‘튜닝’도 유행이다. 트렁크 역사의 초창기에도 여권에 방문 국가별 도장을 찍듯 해당 국가의 스티커를 붙이는 게 ‘부의 상징’으로 유행했었다. “요즘은 구입 즉시 스티커부터 붙이는 분들도 많다”는 게 리모와코리아 정찬희 과장의 귀띔.

아이폰이 휴대폰 액세서리 부가시장을 창출한 것처럼 여행가방도 다양한 부가상품 시장을 형성했다. 네임택, 방수커버, 스티커 등을 비롯해 쇼핑백들을 주렁주렁 매달 수 있는 캐리어 탠덤후크도 기발하다. 여행용품 판매점 트래블메이트의 엄준민 마케팅팀 대리는 “캐리어 보호벨트나 커버는 해외에서는 안전상의 이유로 많이 사용하는 고전적 아이템들인데 국내에서는 최근 들어 유행하고 있다”며 “점점 고가의 여행가방을 많이 사용하는 추세고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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