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추가가(鄒家街)라는 마을이 있다. 추(鄒)씨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한국이 광복 후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시켰다면 초등학생들도 알았을 지명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1910년 나라가 망할 무렵 양반 사대부들 중에는 두 부류의 움직임이 있었다. 하나는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움직임이었다. 1910년 대한제국을 삼킨 일제는 그 해 10월 7일 ‘조선귀족령’을 만들어 76명의 한국인들에게 후작ㆍ백작ㆍ자작ㆍ남작 등의 작위를 주고 막대한 은사금도 주었다. 이 76명의 한인들은 대부분 당대의 쟁쟁한 명문가들이었다.
반면 전국 각지에서 일단의 양반 사대부들이 만주로 집단 망명했다. 이 움직임은 크게 세 갈래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가장 먼저 망명한 양반 사대부들은 강화도에 살던 양명학자들이었다. 명나라 왕수인(王守仁)이 성리학에 반대하면서 제창한 양명학은 정작 명나라에서는 이단(異端) 취급을 받지 않았지만 조선에서는 이단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조선 양명학의 비조라고 할 수 있는 하곡 정제두(鄭齊斗)는 스스로 강화도에 이주해서 양명학을 공부했는데, 조선 후기 내내 이단으로 몰렸던 양명학자들이 망국 후 가장 먼저 만주로 망명한 것이다.
또 한 갈래로 서울의 우당 이회영 집안이 있다. 당파로는 조선 후기 내내 야당이었던 소론(少論)에 속하던 이회영 일가는 나라가 망하자 모든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했다. 또 하나는 경상도 안동의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가였다. 처남, 매부 사이였던 두 사람은 조선 후기 내내 재야에 속하던 남인(南人) 계통이었지만 나라가 망하자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다. 이들은 만주 유하현의 횡도촌(橫道村)에 자리를 잡았는데, 전국 각지에서 망명한 사대부들이 횡도촌에 모였다는 사실은 미리 계획한 전국적 단위의 집단망명이었음을 뜻한다.
이들은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뒷산인 대고산에 모여 노천 군중대회를 개최하는데,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이 쓴 ‘선부군유사’에는 “적의 앞잡이가 염탐할까 염려하여 대고산 속에 들어가 노천에서 회의를 열었다. 부군(府君ㆍ이상룡)이 경학사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였는데, 말과 기색이 강개하여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때 서간도 이주 교민 자치 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는데, ‘경학사 취지서’는 “부여의 옛 땅은 눈강(嫩江ㆍ송화강 지류)에 달하였은즉 이곳은 이국의 땅이 아니요, 고구려의 유족들이 발해에 모였은즉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옛 동포들이 아닌가”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경학(耕學)은 말 그대로 ‘일하면서 배우자’는 뜻인데, 경(耕)은 만주 이주 교민들의 생업을 뜻하고 학(學)은 경학사에서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를 뜻했다. 경(耕)으로 생업을 해결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에서 젊은이들에게 전문 군사훈련을 가르치다가 결정적인 때에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해서 일제를 내쫓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전략이었다.
경학사 사장으로 선출된 이상룡은 1911년 정월 압록강을 건너면서 “삭풍은 칼날보다 날카로와/ 차갑게 내 살을 에는구나…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朔風利於劍/ ??削我肌/ 此頭寧可斫/ 此膝不可奴)”라고 읊으며 망명해 경학사 사장이 되었다. 이상룡은 ‘만주에서 겪은 일’이란 시에서 “정부의 규모는 자치가 명분이고, 삼권분립은 문명국을 따른 것이네(政府規模自治名 三權分立倣文明)”라고 읊는데 이는 광복 후 수립할 새 나라의 정치체제로 삼권분립에 의한 민주공화국을 지향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이것이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제의 모체이다.
이렇게 망명지사들은 망국 후 삼원보 추가가에 모여서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미래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해외에서는 가장 빠른 3월 12일 유하현 삼원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다. 또한 1920년 홍범도, 김좌진 등이 이끄는 한국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제 정규군을 초토화시킨 봉오동, 청산리 승첩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견 장교로서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갖고 일본군과 맞섰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가가와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합니하를 방문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가장 많은 자금을 쾌척한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李石榮)이 경기 남양주 출신이기 때문이다. 오기 전에는 길림성 화룡(和龍)에 있는 역사학자이자 대종교(大倧敎) 2대 교주로서 수원 신인 무원 김교헌(金敎獻)의 묘소도 참배했다. 필자가 처음 추가가를 찾았던 10여년 전에는 온 산하가 눈에 덮여 있었다. 지금은 녹음이 푸르지만 마음은 혹한기 못지 않다. 이상룡은 고향을 떠나면서 “다른 날 좋은 세상에 돌아와 살리라(昇平他日復歸留)”고 읊었는데, 광복 70주년을 코 앞에 둔 지금도 좋은 세상은 온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