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밤 9시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출발해 19일 오전 11시 이르쿠츠크역까지 총 62시간. 꼬박 3박 4일, 시베리아 평원 3,040km를 내달리는 열차 안에서 휴대폰은 아예 먹통이 됐다. 장기간의 열차 운행으로 물 자체가 부족한 데다 세면대밖에 없어 나흘간 샤워는커녕 머리 감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바깥 세상과는 단절됐지만 ‘2015 유라시아 친선특급’ 참가자 250여명은 저마다의 지식, 경험, 재능을 나누며 지루함을 달랬다. 18량의 객차마다 이야기 꽃이 넘쳐 났다. 세대, 직업을 뛰어넘어 친선특급 열차에 탔다는 것만으로도 하나가 됐던 시간이었다.
대학에서 시를 전공한 윤승철(27)씨는 이번 여정에서 매일 역사 강의를 듣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그의 룸메이트는 이준 열사 외증손자 조근송(60)씨. 두 사람은 17일 오전 항일 독립운동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 사태가 발생한 스바보드니시 근처를 지나는 데 맞춰 흔들리는 열차 통로에 서서 제사를 지냈다. 마땅한 음식이 없어 김과 밤, 소주 한 잔 올리는 게 고작이었지만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숙연했다. 조씨는 “희생된 독립운동가 선조 분들의 희생이 값질 수 있도록 젊은이들이 노력해줘야 한다”며 윤씨 어깨를 두드렸다. 윤씨를 비롯한 대학생 참가자들은 “생생한 역사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게 가장 큰 수확”이라고 입을 모았다.
열차 안에서의 생활은 간단했다. 아침 점심 저녁 끼니 때 즈음해 번갈아 가며 최소 5번의 각종 강연이 열린다. 고려인부터 보드카까지 주제도 다양하다. 국회의원부터 교수, 대학생 등 세대와 직업을 뛰어넘은 참가자들은 다들 필기까지 하며 학구열을 불태운다. 강연이 끝나도 삼삼오오 식당칸에 모여 다시 한 번 열 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여정 기간 강의는 빼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양서지(24ㆍ여ㆍ인천대 러시아 통상학과)씨는 “서울에서도 듣지 못하는 알찬 강의를 열차에서 접하게 돼 너무 뿌듯하다”고 말했다
강연이 아니어도 하루 종일 바쁜 사람들도 있다. 한복 디자이너 권진순씨(56ㆍ여)씨는 자신의 객실과 식당칸 자리를 오가며 조각보 천을 잇는 바느질 작업에 열중했다. 권씨는 참가자들이 적어낸 통일 염원 메시지 1,000개를 이어 붙인 대형 태극기를 종착지인 독일 베를린에서 공개할 생각이다. 경찰청에서 파견 나온 김세민(38)씨는 “혹시 도움을 청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열차 안에서도 경찰 조끼와 모자를 벗지 않고 24시간 순찰을 돌고 있었다. 이 밖에 아침 점심마다 열차 내 라디오 방송을 하거나, 재능 기부 차원에서 오카리나 등 악기를 가르쳐주는 참가자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긴 ‘3박 4일 열차생활’이라는 고된 일정을 넘긴 유라시아 친선특급은 북선과 남선이 합류한 이르쿠츠크에서 하루 휴식했다. 이어 21일 한 열차로 합친 뒤 출발, 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까지 달리게 된다.
이르쿠츠크=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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