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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홍학 인형' 미국을 휩쓸고 퇴장하다

입력
2015.07.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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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핑크 플라밍고 탄생, 출시하자 불티 주택가 장식

1972년 同名 컬트영화 개봉, 저항·반발의 시대 상징으로

핑크빛 같은 삶과 사랑, 부부 공식 석상서 항상 같은 옷

도널드 페더스톤과 그가 만든 핑크 플라밍고의 운명은 여러모로 닮아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삶과 사랑이 플라밍고의 빛깔처럼 핑크빛으로 화사했다. 바라만 봐도 기분이 가벼워질 것 같은 인상과 태도, 인사라도 건네면 앞장서 유쾌한 대화로 이끌어 줄 듯한 느낌. 미국인들이 플라밍고에서 받은 첫인상이 어쩌면 그러했을 것이다. AP뉴스
도널드 페더스톤과 그가 만든 핑크 플라밍고의 운명은 여러모로 닮아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삶과 사랑이 플라밍고의 빛깔처럼 핑크빛으로 화사했다. 바라만 봐도 기분이 가벼워질 것 같은 인상과 태도, 인사라도 건네면 앞장서 유쾌한 대화로 이끌어 줄 듯한 느낌. 미국인들이 플라밍고에서 받은 첫인상이 어쩌면 그러했을 것이다. AP뉴스

월트 디즈니사의 ‘노미오와 줄리엣(Gnomeo and Juliet, 2011)’은 제목의 패러디(gnomeo)가 암시하듯, 뜰의 난쟁이 인형들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한 코믹 3D 애니메이션이다. 거기 ‘페더스톤’이란 이름의 핑크 플라밍고가 등장한다. 핑크 플라밍고 역시, 백설공주의 난쟁이들과 더불어 ‘한때’미국 주택가 정원을 장식하던 인기 아이템 가운데 하나였고, 페더스톤은 1957년 그걸 만든 디자이너 이름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뒷얘기지만 그 뒷얘기 뒤에는 꽤 흥미로운 사연이 있고, 흥미거리로만 치부할 수 없는 한 시대의 열정과 미학적 고민이 배어 있다.

핑크 플라밍고는 키 90cm남짓 되는 플라스틱 인형이다. 강렬한 네온 핑크 빛 몸통에 가느다란 쇠막대기 다리가 있어 마당에 꽂아둘 수 있는, 한 쌍에 2.76달러(시판 가격) 하던 뻔한 장식 인형. 그 인형에 60년대 미국인들이 왜 그렇게 열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우선 가격 부담이 적었을 테고, 잔디와의 보색이 주는 파격적 생동감을 일탈처럼 즐겼을 수도 있다. 핑크 플라밍고는 출시되자마자 순식간에 100만개가 팔려 나갔고, 80년대까지 무려 2,000만 개가 팔렸다.

핑크 플라밍고는 미국적 키치(Kitsch)의 전형이었다. 대량생산된 싸구려 모조품의 기이한 유행을 달갑잖아 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대중의 저급한 취향을 조롱했고, 부동산 가치가 떨어질까 봐 단지 내에 아예 핑크 플라밍고를 들이지 못하게 계약서에 명시한 주택 개발업자들도 있었다.(NBC, 07.5.31) 남의 집 마당의 플라밍고를 몰래 뽑아다가 먼 동네 길가에 꽂아두고 그걸 사진을 찍어 주인에게 보내는 식의 장난으로 골치를 썩이는 일이 유행하기도 했다. 대중문화 평론가인 시라큐스대 로버트 톰프슨 교수는 “미국인들의 팡테옹(만신전)에는 저급하고 부자연스러운 기둥 두 개가 있는데, 그 하나가 벨벳 엘비스(velvet Elvis- 벨벳 천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얼굴을 그린 70년대 유행 상품)이고, 또 하나가 핑크 플라밍고”라고 했다.(CSMonitor, 06.11.2) 그러거나 말거나 핑크 플라밍고의 인기는 천정부지였고, 수많은 모조품과 팬던트 등 응용 상품들이 봇물을 이뤘다. 뉴욕타임스는 “핑크 플라밍고가 20세기 중반의 미국의 풍경을 바꿔놓았다”고 쓰기도 했다.

페더스톤은 1996년 이그노벨상(Ig-Nobel Award)을 탔다. ‘기발한 연구 연감(Improbable Research’이라는 매사추세츠 주의 코믹 과학잡지가 1991년 제정한 이그노벨상은 재미있고 엉뚱한 연구나 창작 성과에 대해 매년 수여하는 패러디 노벨상으로 7개 분야에 걸쳐 시상한다. 페더스톤은 “독창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한 공”을 인정받아 예술상을 탔는데, 연감 편집인인 마크 에이브러엄슨(Marc Abrahamson) 자신이 페더스톤과 핑크 플라밍고의 광팬이었다. 핑크 플라밍고가 출시된 지 만 40년이 되던 99년 페더스톤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재미있고 아름다운 핑크 플라밍고 콘테스트를 개최했고, 출품된 사진들에 설명을 달아 ‘The Original Pink Flamingos, Splendor on the Grass’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페더스톤은 핑크 플라밍고에 대한 비판과 조롱을 늘 웃음으로 넘기곤 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만일 당신이 울긋불긋한 꽃들을 트랙터 타이어 같은 데다 심어두고 그 주위를 핑크 플라밍고로 잔뜩 장식한다면 아주 촌스러울 겁니다.” 핑크 플라밍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어떻게 두느냐가 관건이라는 게 그의 응수였다. 그는 ‘이건 어떠냐’고 반문하듯 자신의 피츠버그 집 뒤뜰을 플라밍고 밭으로 꾸몄는데, 그들이 탄생한 해의 숫자 57마리였다. 2007년 8월 시카고트리뷴 인터뷰에서 왜 뒷마당이냐는 질문에 그는 “앞마당에 두면 집 근처 학교 학생들이 놀러 와서 앉을 데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페더스톤(Donald Featherstone)은 1936년 1월 25일 매사추세츠 우스터에서 태어났다. 10살 무렵부터 그림과 조각 공부를 시작했고 57년 우스터미술관 부설 예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니언 프로덕츠’라는 플라스틱 정원 장식품 제조회사에 취직했다. 그는 “(순수예술로는)굶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주위에서는 내 작업(미술)이 망가질 거라고 우려했지만 당시 내겐 땡전 한푼 없었고, 장식품 디자인도 해볼만하다 여겼다”고 말했다.(Leoninster Champion, 06.11.03) 그의 예술적 재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취업(당시 인식으론 ‘싸구려’ 플라스틱 공장)을 두고 시카고트리뷴 기자는 07년 인터뷰에서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젓가락 장단을 치려는 격이었다”고 썼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오리 디자인이었다. 그는 오리를 사서 욕조에서 키우며 디자인을 했고, 나무로 조각했다. 재료를 부어 제품을 만들 거푸집(금형)의 원형이었다. 오리는 인근 콕스홀 공원에 방사했다고 한다.

두 번째가 플라밍고였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에서 가장 멋진 자태로 서 있는 놈과 새치름하게 앉아 있는 놈을 한 쌍으로 골라 만든 게 ‘핑크 플라밍고’였다. 진화의 새로운 성취인 양, 훗날 그는 ‘포에니콥테리스 러버 플라스티쿠스(Phoenicopteris Ruber Plasticus)’라는 학명을 붙였다. 페니키아 원산의 붉은 플라스틱 생명체쯤의 의미일 테다. 페더스톤은 96년 회사 사장으로 승진했고, 2000년 은퇴할 때까지 약 700종- 펭귄 꽃병 타조 소 산타클로스 등등-을 디자인했다. 타조처럼, 핑크 플라밍고만큼 많이 팔린 것도 더러 있었지만, 그만큼 유명해진 것도 논쟁적인 것도 없었다.

논쟁은 1972년 존 워터스(John Waters)의 전설적 컬트영화 ‘핑크 플라밍고’의 개봉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역겨운(드렉퀸)’ 사람들이 역겨운 장면(항문 클로즈업, 개똥 먹기 등)과 역겨운(외설스러운) 대사들로 역겨운 삶을 역겹게 전시하며 누가 더 역겨운지 겨루는, 그럼으로써 “관객들을 구역질 나게 하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 영화다.

영화의 메시지는 자명했다. 바야흐로 히피 문화와 반전ㆍ뉴레프트(신좌파) 운동의 영향이 미국 사회 전반을 휩쓸던 때였다. “만일 관객이 영화를 보다가 구토를 한다면 영화에 대한 기립박수로 여기겠다”던 워터스의 도발적 선언이 겨냥한 것은 한 마디로 세상의 ‘고상한’ 미학과 질서였다.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의 품위와 격조에 드랙퀸(여장 남자)의 항문을 들이댐으로써 워터스는(영화는) 촌스러움에 대한 조롱을, 토악질이 날 만큼 통렬하게 조롱했다. 그의 영화 주인공은 여장남자 ‘디바인’(해리스 밀스테드 분)이었지만, 그가 입은 핑크 드레스를 보건 영화 제목을 보건, 페더스톤의 핑크 플라밍고가 모티브였음은 자명했다. 제작비 1만 달러로 125만 달러를 벌어들였을 만큼 영화는 성공했고, 그와 함께 페더스톤의 핑크 플라밍고에도 저항과 반발, 탈경계(키치의 예술성 같은)의 상징적 의미가 더해졌다. 성소수자들은 성정체성의 자부를 담아 핑크 플라밍고로 뜰을 장식했고, 94년 뉴욕 게이 문화행사의 공식 명칭을 ‘핑크 플라밍고 릴레이’라 달기도 했다. 저항적 중산층 베이비부머들도 그들의 ‘나쁜 취향’을 과시하듯 플라밍고를 껴안았고, 1979년 위스콘신대 학생들은 총장실 앞 잔디밭에 1,000 개의 핑크 플라밍고를 꽂아 놓은 일도 있었다. 물론 좋아하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핑크 플라밍고가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대접’받는 데 대해 페더스톤이 가타부타 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다만 그는 “나는 내 일과 내가 만든 것들을 사랑했고, 또 행복했다. 내 작품들이 삶의 필수품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원했고, 그로써 행복했다면 된 거 아니냐”고 말하곤 했다. 어떻게 바라보든 좋아해주고, 그래서 좋다면 (나도) 좋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사실 페더스톤 자신도 플라밍고 만큼이나 유명인사였다. 그 인기는 원작자로서 온갖 언론에 등장하면서 비롯된 것이지만, 플라밍고의 핑크 빛처럼 유별나게 밝고 화사한 그의 삶과 사랑이 알려진 덕이기도 했다.

그가 아내 낸시 산티노(Nansy Santino)를 만난 건 75년 시카고 무역 박람회장에서였다. 둘은 이듬해 결혼할 때까지 산티노가 살던 세인트루이스를 오가며 장거리 연애를 했는데, 더우나 추우나 양복에 넥타이까지 갖춰 입고 다니는게 안쓰러웠던 낸시가 편한 셔츠를 직접 만들어 선물했고, 결혼한 뒤로는 속옷을 제외한 그의 모든 옷을(대부분 화려한 색상과 무늬였다) 만들어 주게 된다. 낸시가 만든 옷은 늘 두 벌이었고, 부부는 공식 출장 방송출연 파티 행사 가리지 않고 언제나 똑같은 옷을 입고 다녔다. 낸시는 2013년 5월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를 보고 웃는 이들을 보며 함께 웃고 서로 눈맞추며 특별한 결속감을 나누곤 했고, 돈(도널드의 애칭)이 혼자 출장을 갈 때도 언제 무슨 옷을 입을지 사전에 약속해 멀리 있어도 똑 같이 입곤 했다”고 썼다. 낸시는 뒷말을 의식한 듯 “우리는 각자 개인으로서 강한 아이덴터티를 갖고 있었고, 같은 옷을 입는다고 개성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나는 돈과의 친밀감을 느꼈고, 우리는 그 생활이 싫었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고 덧붙였다.(13.5.25) 그의 집에는 계절별 상황별로 정돈된 커플복이 옷장 네 개에 가득했고, 플라밍고 무늬의 옷만도 40여 벌이었다고 한다.

핑크 플라밍고는 색과 디자인이 조금씩 다른 유사 제품들과 오랜 세월 경쟁해야 했다. 유니언 프로덕츠는 85년부터 플라밍고의 꼬리 깃 아래에 페더스톤의 서명으로 진품 인증마크를 새겼고, 97년부터는 잉크로 그리던 플라밍고의 눈을 유리 동공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리고 2006년 문을 닫는다. 원료 단가와 전기료가 비싸 수지가 안 맞았고, 다른 사정도 겹쳐 경영난을 겪던 차였다.

핑크 플라밍고가 50살을 맞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팬들의 애도가 빗발쳤다. 온라인 사이트에는 애틋한 추억을 소개하는 글들이 넘쳐났고, 회사를 원망하는 글도 이어졌다. 공장이 있던 르민스터 시는 재생플라스틱으로 만든 친환경 핑크 플라밍고를 시 차원에서 독자 개발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한 채 흐지부지됐다. 그 무렵 페더스톤은 여러 인터뷰에서 그만의 추억담을 유쾌하게 전하곤 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어찌 되는지 두고 보자. 나는 내 ‘늙은 소녀’가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듬해 뉴욕에 본사를 둔 ‘코다 컴퍼니’라는 회사가 유니언 프로덕츠를 인수, 페더스톤의 핑크 플라밍고를 부활시켰다.

현재 핑크 플라밍고의 아마존 소매가는 20~30달러 선이다. 물론 인기나 매출이 전성기 때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세기 미국 문화를 개괄한 ‘Flight Maps: Adventures With Nature in Modern America(1999)’라는 책에서 페더스톤의 핑크 플라밍고를 “(직업)예술과 (딜레탕트적)취향의 경계를 가로지른 상징”이라 썼던 작가 제니 프라이스(Jenny Price)는 2006년 유니언 프로덕츠가 문을 닫은 직후 뉴욕타임스 칼럼에 이렇게 썼다. “LA 컨템퍼러리 아트뮤지엄이 핑크 플라밍고를 팔기 시작한 90년대 말부터, 97년 선댄스영화제가 영화 ‘핑크 플라밍고’의 25주년 기념행사를 벌인 때부터, 아니 더 앞서 핑크 플라밍고에 진품 인증 마크가 달리면서부터, 핑크 플라밍고의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 것인지 모른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 키치가 미술관에 놓이고, ‘역겨움’의 새로움이 진부해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프라이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의 유튜브 세대들도 아마 그들이 맞서야 할 전통을 찾고, 맞설 무기도 찾아야 할 것이다. 내 세대는 이제 퇴장하기 시작했다.(…) 고이 잠들길, 내 핑크 플라스틱 친구여.”(06.11.17)

도널드 페더스톤이 6월 22일 별세했다. 향년 79세.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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