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논바닥에만 들어서면 숨어있던 태양이 쨍… 신이시여 왜?"

입력
2015.07.17 18:07
0 0

잠깐 그늘에서 쉴 땐 하늘도 휴식, 일만 하려면 햇볕이 쫓아다녀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는 건가

해가 떨어져도 하늘은 뜨겁다. 맑으면 맑다고, 비 오면 비 온다고 하늘을 원망하면서 무슨 농사를 짓겠다고 하는지…. 내가 봐도 아직 멀었다.
해가 떨어져도 하늘은 뜨겁다. 맑으면 맑다고, 비 오면 비 온다고 하늘을 원망하면서 무슨 농사를 짓겠다고 하는지…. 내가 봐도 아직 멀었다.

아침 6시, 마을회관으로 모여드는 장화에는 흙과 물 젖은 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논에 피 땜시 못해 묵겄네. 이눔의 농사 왜 맨날 짓고 앉았는지 몰러.” 동 트기 전부터 논에 다녀온 어르신이 마루로 올라서며 한탄했다. “그 소리 들은 지 50년 됐구마. 맨날 똑 같은 소리여.” “벨 수 있능가. 할 줄 아는 게 이것 밖에 없구마.” 다른 분들도 길게 추임새를 넣었다.

친환경 논농사를 짓는 분들이 모여 공동방제 작업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여름에 세 차례 공동으로 약을 치는데, 작년에 작업했던 사람들이 올해는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자 방법을 찾아보자고 모였다. “약도 대주는데 못하겠다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말여. 하루라도 젊은 사람덜이 해야지 늙은이덜이 나서야겠는가?” 낼 모레면 팔순인 아버님이 호소하셨다. “아버님, 서너 명이 100마지기 들락거리는 게 쉽지 않아요. 호스 끌고 논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그냥 지쳐버려요. 가 보진 않았지만 괜히 월남전 생각도 나고 그런당게요.” 동갑내기 이장이 젊은이 대표로 나섰다. “사람을 더 붙이면 안되겄능가.” “사람이 어딨대요. 다 해야 서너명인디요.” 그 서너 명엔 초보인 나도 들어간다. 마을 주민 40여명 중 농사 짓는 50대 이하가 고만큼이다.

돈을 갹출해서라도 일하는 사람들 기운이나 좀 나게 하자고 결론냈지만 돈을 낼 사람이나 받을 사람이나 뒤끝은 개운치 않았다. 매년 반복되는 일인데 답이 없다. “친환경이고 머고 이제 안 할라네. 내년에 확 갈아불고 철쭉이나 심어불랑게.” 다시 장화를 신던 어르신이 상한 속을 말씀으로 달랬다. 작년 요맘때 요 시각에 비슷한 말씀을 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매년 똑 같은 말씀 반복해도 그러면 다행이다. 아직 일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이봐 물 좀 줘 보시게.” 아침 댓바람에 농막에 들어선 장씨 아저씨는 땀이 흥건했다. 찬물을 따라 드리니 막걸리 흘리듯 턱 밑으로 물을 떨구며 시원하게 원샷 하셨다. “하아따, 뭔 날씨가 아침부터 찐다냐. 고춧대 손보는디 땀이 떨어져서 못하겄네.” 보호 망 골골이 먼지 낀 선풍기를 거의 끌어안으셨다. D동생도 물장화를 신은 채 농막으로 들어왔다. “아따 논 일은 재미도 없고 힘만 들어요.” 논에서 일하다 물먹고 싶어 왔단다. “야 논이 어딘데 물 마시러 여까지 오냐?” 퉁바리를 주니 “헤, 성님 보고 싶어서 왔지라” 눈웃음을 친다.

“올해는 고추 금이 좀 나을 거라던데요.” 아저씨께 근거 없는 위로를 드렸더니, 선풍기를 풀어주신 아저씨가 다시 물을 들이키셨다. “나으믄 뭘혀. 또 똥 만들겄지.” “에?” “아 양파 보소. 작년에 양파 값 바닥일 때 죽겄다고 아우성쳐도 아 왜 이러세요 별수 있나요 하던 놈들이, 오른다 소리 나오니께 잽싸게 중국서 수입헌다고 안 허는가. 가만 보믄 어떻게든 농산물은 똥값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덜이여.”

D도 끄덕이며 아저씨한테 물었다. “아제, 주식이랑 농사가 같은 점이 있고 다른 점이 있는데 뭔지 아신당가요?” “나가 고렇게 똑똑하면 요렇게 농사 짓고 살겄는가.” D는 제법 심각한 표정이었다. “둘 다 철저하게 시장주의에 따라 움직이는디, 하나는 가격이 내려가면 나라가 껴들고, 하나는 가격이 올라가면 난리친다 뭐 이러더라구요. 형님은 기자였음서 그것도 모르신다요?” 한 건 했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나도 물었다. “너 기자랑 정자도 공통점 차이점이 있어. 뭔지 알어?” “그건 모르지라.” “공통점은 사람 될 확률이 비슷하다는 거고 다른 점은 주먹이 있고 없고 그렇대. 죽을래?” 두 사람 모두 일어나서 농막을 나갔다.

나도 논으로 향했다. 마늘 양파 팔아먹고 콩 심느라 한눈 팔았던 논에 여기 저기 풀 섬이 생겼다. 벼와 풀의 구분이 힘들었다. 예초기 앞에 벼가 다치지 않도록 커버를 씌우고 논으로 들어갔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구분은 갔다. 조심스레 살피며 첫 고랑 작업을 끝내니 머리에 쓴 수건 끝에서 땀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새 수건이 능력을 다한 것이다. 댓 고랑 작업하고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쪽 논만 1백 고랑 정도, 앞이 캄캄했다. 일주일 잡은 일이니 쉬어가며 하자 생각하며 나무그늘로 철수했다.

벼와 잡초 사이에 분홍색 꽃이 피었다. 꽃이 아니라 우렁이 알이다. 모내기와 동시에 투입한 우렁이가 그새 2세를 내놓았다. 우렁이는 수면 아래 어린 잡초를 제거하는 데 효과가 있지만 크게 자란 잡초에는 소용이 없다.
벼와 잡초 사이에 분홍색 꽃이 피었다. 꽃이 아니라 우렁이 알이다. 모내기와 동시에 투입한 우렁이가 그새 2세를 내놓았다. 우렁이는 수면 아래 어린 잡초를 제거하는 데 효과가 있지만 크게 자란 잡초에는 소용이 없다.

논에 있으면 하루에도 열두 번은 족히 마주치는 할아버지가 내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셨다. 논 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늦었어.” “예?” “저 풀을 어쩔 것인가. 이제 약 치기도 힘들게 돼부렀어.” 틀니를 빼고 나오셨는지 움푹 들어간 입술로 애써 말씀하셨다. “그래도 해야죠 뭐. 기계로 하니까 손으로 매는 것보다는 나아요.” “쯔쯔, 모내기하구서 만삼천원짜리 약하나 쳤으면 되는데… 아니면 지금이라도 물 쫙 빼고 제초제를 살짝 쳐보든가.” “어르신 그냥 하는 데까지 해 볼게요.” 걱정해주시는 마음이 고마웠다. 지나가시던 장여사님도 한 말씀 하셨다. “시나브로 조심해서 모 안 다치게 작업해요. 농사꾼 뭐 있간대요. 쌀 하나 보고 농사 짓는거제.”

누구는 귀농 형편을 묻던 중 “논 농사도 지어? 농사꾼 다 됐네” 말했다. 밑도 끝도 없는 얘기 같지만 동의했다. 주식(主食)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없으면 못 산다는 뜻이다. 빈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밥 안 먹고 살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기본을 담당하고 있는 게 농사인데, 그 중 가장 많이 들어가는 쌀이 농사의 기본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기본이 허물어져간다는데 있다.

농지면적은 줄어가고 논 면적은 더 급격하게 줄고 있다. 면적당 매출액이 떨어지는 것도 있고, 기계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일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점차 ‘식구들 먹을 쌀’만 짓는 농가가 늘어나고 팔린 논에는 묘목이나 밭작물이 들어서고 있다. 꽃나무가 한 번 들어선 논에 다시 벼가 자라는 것을 보기는 힘들다. 세계 5대 식량수입국인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식량 자급률 20퍼센트, 양곡자급률 40퍼센트를 버텨주는 것도 쌀 자급률이었다. 이제 얼마 안가 쌀이 부족해서 수입해야 한다면 그 다음 벌어지는 일들은 상상 그 이상일 것이다. 쌀 자루 손에 쥔 나라와 스마트폰 뒷주머니에 꽂은 나라의 승부는 어떻게 될까. 몇 년 전 논에다 밭작물 심으면 보조금 줬던 이유는 뭘까. 장씨 아저씨는 “농사는 계산하믄 답 안 나오네” 하시지만, 바닥인 은행이율보다 수익률이 낮은 논농사를 누가 얼만큼 버텨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논 작업 이틀째, 하늘이 희한했다. 구름은 뭉게거리는데 태양은 잘도 피해 다녔다. 일하는 내내 구름은 그늘을 만들어야 할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조금 있으면 해를 가리겠구나 싶은 자리에 있던 구름도 괜히 움직여 햇살을 텄다. 구름도 공범이었다. 잠깐 그늘에서 쉴 때는 하늘도 쉬었다. 일어서면 여지 없이 태양은 빛났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싶었지만 하늘이 노려볼 만한 큰 잘못은 없었다.

초복이었던 전날 저녁, 복달임하자고 후배 부부가 닭을 삶아와 식사를 같이 했다. 이상하게 햇볕이 나만 쫓아다닌다고 했더니 아내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란다. 연애질에 흥미를 잃은 후 30년간 교회 근처도 안 가 본 사람이 ‘주님의 은총’ 어쩌고 하니 귓등으로도 안 들린다. “해병대도 논일하기 힘들거야. 요즘 TV에 나오는 유격훈련 받는 게 훨 쉬울걸?” 했더니 아내는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 어쩌고 하면서 무시했다. 나도 발끈했다. 방위가 어째서 군대가 아니냐, 행군에 유격에 할 거 다했다. 방위가 군인이면 파리가 새라고? 그래 나 새들 밥 해 멕이는 취사 파리였다. 어쩔래! 여자들 애기 낳은 얘기 많이 하는데, 제왕절개로 낳은 사람한테 애기 낳은 것도 아니라고 하면 되겠냐? 제일 빡센 군대는 자기가 다녀온 군대다. 일장 연설을 하는데 수색대 나왔다던 후배가 내게 물었다. “근데 형님, 군대는 어떻게 안 가셨어요?”

논의 3분의 2가량 마치니 서 있을 힘도 없었다. 얄팍한 물장화는 신발 기능을 못했고, 발톱 아래 군살까지 쑤셔왔다. 몸에 나는 냄새는 체취가 아니라 꼬랑내였다. 내 살 냄새가 이렇게 싫을 수도 있구나 하는 걸 알았다. 다행히 일을 마칠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시원했다. 그렇다고 꼭 다행은 아니었다. 비는 냄새를 씻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냈다. 도저히 뭘 더 할 수가 없었다. 철수하자!

논에 꽉 들어찬 잡초들. 모가 자라는 줄 사이에 골이 보여야 하는데 전체가 하나의 풀 덩어리처럼 뭉쳐있다.
논에 꽉 들어찬 잡초들. 모가 자라는 줄 사이에 골이 보여야 하는데 전체가 하나의 풀 덩어리처럼 뭉쳐있다.

차 트렁크를 열고 한 쪽 다리를 올린 뒤 물장화 고무줄을 풀고 장화를 말아 내렸다. 혹시라도 어스름 빗속에서 뒷모습이 섹시하면 어쩌나 걱정하는데 웬 시커먼 차 한 대가 옆에 섰다. 운전석 시커먼 유리창이 손바닥만큼 내려가더니 눈 만 보이는 여자가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깨끗한 모텔 있을까요?”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보는 서울 강남 스타일의 여자였다. 떨렸다. 친절하게 답해주려고 다가서는데 저 뒤 어둠 속에서 남자가 쑥 튀어나오며 물었다. “이런 데 호텔은 없죠?” 같은 스타일인데 싸가지는 없어 보였다. ‘이런 데? 이런 데가 어떤 덴데!’ 하려다가 준비성 없는 놈들이 성질은 있는 경우가 많아 참았다. 그냥 여자한테 말했다. “무인텔(카운터에 사람이 없는 모텔) 알려드릴까요?” 했더니 예쁘게 끄덕였다. 혹시라도 튀어나올 지 모를 사투리 억양을 누르며 자세히 알려줬다. “고맙습니다 아버님” 하더니 가버렸다. 촌수도 불분명한 ‘아버님’이란 말이 참 싫다.

기분도 그렇고 좀 쉰 것 같아 빗김에 홧김에 다해버리자 생각하고 다시 장화를 신었다. 여벌로 가져온 셔츠를 갈아입으니 좀 상쾌해졌다. 다시 젖겠지만 바지도 갈아입었다. 팬티가 없는 게 한이었다. 트렁크에 있던 우비 상의를 꺼내 입고 비닐 바지에 다리를 끼우는데 가랭이에서 “부욱” 소리가 났다. ‘비옷이니 대충 입지 뭐’ 하는데 또 “부욱” 거렸다. 왼쪽 다리부분이 가랭이에서 하단까지 다 튿어져 나풀거렸다. 기운이 쪽 빠졌다. 욕이 튀어나왔다. “쿼어바디스!”

생각해보니 욕도 아니고 뜻도 틀렸다. 그냥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신이시여, 나한테 왜 이러시나이까...”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