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승전결뉴스]

유죄냐 무죄냐. 결론을 기대했지만 끝나지 않았다. 2년 넘도록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 16일 대법원은 이 사건 상고심에서 원심이 확정한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다며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원세훈(64)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진위 판단도 자연스레 유보됐다. 원 전 원장이 이끌던 국정원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건 발단부터 대법원 상고심까지 있었던 일들을 '기승전결'로 정리했다.

16일 대법원은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64) 전 국정원장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사진은 지난 2월 9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는 원 전 원장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 : 심상찮은 '국정원 댓글녀' 등장

18대 대통령선거를 8일 앞둔 2012년 12월 11일, 당시 민주통합당(현 새정치민주연합)은 국정원 직원이 인터넷 사이트에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달고 있다고 주장하며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을 급습했다. 오피스텔은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김모씨의 숙소였고, 민주당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이른바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의 시작이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12월 16일 밤 11시, 서울 수서경찰서는 예고도 없이 '국정원 댓글녀 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정원 직원의 PC와 노트북 등에서 대선 관련 댓글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였다. 사흘 뒤 대선에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기사보기)

대선은 끝났지만 의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경찰 수사 결과 국정원 여직원인 김씨가 '오늘의 유머' 등 인터넷 사이트에서 아이디 16개로 대선 관련 글에 99차례 찬반 표시를 한 흔적이 발견됐다. 김씨가 직접 작성한 정치적 성향의 댓글도 경찰은 찾아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경찰 수사는 좀체 속도가 나지 않았고 사건 실마리도 풀리지 않았다.

2013년 1월 4일,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가 불법선거운동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수서경찰서에 들어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승: 국정원 댓글 의혹 수사 ‘험난한 여정’

대선 이듬해인 2013년 3월 들면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국정원 댓글 사건'의 윗선 아니냐는 짐작의 개연성이 부쩍 커졌다. 원 전 원장이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정책을 홍보하고 종북좌파의 사이버 선전·선동에 적극 대처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담긴 '원장님 지시·강조말씀' 자료가 공개되면서다. 국정원 직원들을 대선 등 정치 현안 개입에 조직적으로 동원한 것 아니냐는 의심도 생겨났다. (▶기사보기)

사건 무마 압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사건 초기 수사를 지휘했던 권은희(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하면서다. 김용판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수사를 방해하고 허위 내용을 담은 결과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다는 게 권 전 과장의 주장이었다.

바통은 검찰이 이어받았다. 민주당이 원 전 원장을 국정원법 위반과 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기 때문이다.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서울중앙지검에 '특별수사팀'을 구성했고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현 여주지청장)을 팀장으로 임명했다. 검찰은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s·전자증거물을 사법기관에 제출하기 위해 휴대폰, PDA, PC, 서버 등에서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는 디지털 수사 과정) 요원을 투입, 인터넷 게시글과 통화 내역을 정밀 분석하는 등 국정원 심리전단의 인터넷 활동 규모 파악에 나섰고 원 전 원장을 공직선거법 및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기사보기)

검찰 수사 과정 역시 험난했다. 원 전 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과 구속 수사 여부를 놓고 검찰과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현 국무총리) 사이에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과정에서 채 총장이 밉보였다는 얘기도 흘러 나왔다. 공교롭게도 채 총장은 그해 9월 혼외자 의혹에 둘러싸여 물러났는데, 채 총장의 혼외 자식 정보를 캐는 데 청와대와 국정원 직원들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기사보기)

조직 내분도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의 외압이 있었다고 윤 팀장이 폭로하자 조 지검장은 항명이라고 반박했다. 결국 조 지검장은 사퇴했고 윤 팀장도 좌천성 전보 인사 대상이 됐다.

●전: 뒤집힌 항소심… 고개 숙인 원세훈

1·2심 결과는 엇갈렸다.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 이범균)는 국정원법 위반 혐의만 유죄로 인정하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해 원 전 원장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반면 2심 재판부(서울고법 형사6부·부장 김상환)는 1심 판결을 뒤집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까지 유죄로 인정,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기사보기)

공직선거법 유 ·무죄를 가른 핵심 증거는 '27만 트윗글'이다. 1심에서는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던 심리전단 안보5팀 직원의 이메일 첨부파일(시큐리티파일)의 증거 능력이 2심에서는 인정된 것이다. 1심과 비교할 때 정치·선거 개입에 쓰인 국정원 직원들의 트위터 계정이 716개, 트윗글은 27만4,800건으로 각각 증가했다.

2심 재판부는 이 증거 분석을 통해 '2012년 8월 이후에 올린 글은 선거운동'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국정원 댓글'이 정치 관여 뿐 아니라 선거 개입에도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행위는 헌법이 요구하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외면한 채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 과정에 개입한 것으로 대의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했다는 근본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다"며 "원 전 원장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심리전단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일관되게 독려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기사보기)

원 전 원장은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변론은 김황식 전 총리가 맡았다. 대선을 앞두고 실시된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공작'이 선거에 영향을 줬다는 최종 결론이 대법원에서 내려질 경우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기관에 의한 조직적인 불법 선거운동 수혜로 당선됐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고 정통성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되는 만큼 정권 사활이 걸린 일이었던 셈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혐의로 항소심에서 실형을 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상고심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16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으로 들어서 자리에 앉고 있다. 연합뉴스

●결: 끝나지 않은 '국정원 대선 개입' 논란

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공직선거법 및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 전 원장에게 징역 및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한 원심(2심)을 깨고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유무죄에 대한 판단 없이 쟁점이 된 사실관계를 다시 확정하라는 취지다. (▶기사보기)

대법원이 사건을 돌려보낸 건 2심에서 핵심 증거로 채택된 심리전단 안보 5팀 직원 김모씨 이메일 첨부 파일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법원 재판부는 "국정원 직원 김모씨의 컴퓨터에서 발견된 시큐리티 파일 등이 국정원 심리전단의 업무 목적으로만 작성된 것으로 보기 어려워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이에 대해 증거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원심은 전문증거에 관한 형사소송법 제315조를 오해한 잘못이 크다"고 지적했다

애초 국정원 직원 김씨는 법정에서 이 파일이 자신이 작성한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1심은 형사소송법 313조에 따라 작성자가 불분명한 파일을 증거로 볼 수 없다고 봤다. 하지만 2심은 “김씨가 자신의 업무상 필요에 따라 작성·관리한 것으로 보인다”며 형사소송법 315조에 따라 신용할 만한 문서라고 판단, 증거로 인정했다. 대법원이 1심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기사보기)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는지에 대한 판단도 보류됐다. 1·2심에서 쟁점이 된 공직선거법 유무죄 여부에 대해 대법원 재판부는 "사실관계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정원 활동 실체에 관한 원심 판단의 적법성을 따질 수 없다"고 밝혔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정치사회적 논쟁은 계속될 전망이다. 파기환송심에선 검찰과 변호인단이 증거물의 증거 능력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을 놓고 다시 신경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대법원이 사건의 핵심 증거물이었던 이메일 첨부 파일의 증거 능력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다시 공을 넘겨 받은 서울고법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된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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