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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인도와 한국의 길

입력
2015.07.1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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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 인도에 와 있다. 인도의 대표적 국제 학술교류기관인 ‘인도국제문화교류원(ICCR)’이 주최한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학술회의의 주제가 가야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와 그녀의 모국인 아유타국에 관한 것이다.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는 많지만 허황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관련된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김수로왕과 허황후를 공통의 시조로 모시는 가락종친회만 700만에 이른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삼국을 중심으로 쓴 정사(正史)이고, 또 사마천의 ‘사기’처럼 ‘본기’ ‘열전’ ‘지(志)’의 형식을 취한 관찬(官撰) 사서(史書)이기 때문에 가야를 독립적인 항목으로 설정하지는 않았다. 반면 일연의 사찬(私撰)인 ‘삼국유사’는 ‘삼국’이란 한정어가 붙었음에도 ‘가락국기’를 독자 항목으로 설정해 베일 속에 묻힐 뻔 했던 허황후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가락국기’를 실으면서 그 출처에 대해서 고려 문종 때인 대강(大康ㆍ1075~1084) 연간에 금관(金官) 주지사(知州事)의 문인(文人)이 지은 것을 요약해서 싣는다고 밝혔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락국은 수로왕이 서기 42년에 건국했는데, 동북아시아에서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여러 나라들처럼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사화(卵生史話)를 갖고 있다. 게다가 수로왕이 든 황금색 상자에 하늘로부터 자줏빛 줄이 드리워져 닿았다는 천손사상(天孫思想)도 갖고 있다.

서기 48년 허황후는 “바다 서남쪽에서부터 붉은 빛의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며 북쪽을 향하여” 와서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다. 허황후는 자신의 출신국에 대해서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라고 말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허황후가 본국에 있을 때 부모의 꿈에 상제(上帝)가 나타나 ‘공주를 가야에 시집보내라’고 명령해서 즉시 배를 타고 가야에 왔는데 약 2개월에 걸친 노정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간 허황후의 본국인 아유타국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은 물론 문학인들도 가세해 여러 가설을 내놓았다. 인도의 아요디아(Ayodhya) 왕국이 1세기 이전에 태국 메남강가에 건설한 아유티야(Ayuthya)에서 온 왕녀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고, 인도 아요디아국에서 중국의 사천성(四川省) 안악현(安岳縣)으로 집단 이주해 살던 허씨족(許氏族) 일부가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 북한의 김석형은 일본 열도 내에 삼국과 가야의 분국(分國)들이 여럿 있었다는 분국설에 따라서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에서 본국 가야와 혼인하기 위해 돌아온 왕녀라고 보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허황후가 이때 불교도 가져왔다는 기록들은 지금껏 논란이 되고 있다. ‘삼국사기’는 4세기 후반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의 국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고구려에 불경과 불상을 전한 것을 삼국에 불교가 전래한 시초로 보고 있는데, 가야는 이보다 300여 년 앞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락국이 있었던 김해 일대와 부산에는 ‘가락고찰(駕洛古刹)’이라 불리는 여러 고찰들이 있다. 은하사(銀河寺), 해은사(海恩寺), 장유사(長遊寺) 같은 사찰들인데, 이런 사찰들에 전해지는 사찰 창건에 관한 연기(緣起)들은 대부분 서기 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사료들이 조선 시대에 작성된 것들이 많다는 점에서 신빙성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민간전승을 무조건 부인하는 것도 합리적인 태도는 아니다. 당(唐)나라 현장(玄?ㆍ602~664)이 19년간 인도를 순례하고 당 태종 정관(貞觀) 20년(646)에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아유타국(阿踰陀國)이 나오는데,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아유타국’과 한자(漢字)까지 같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성함(星函)의 ‘서역기(西域記)’라는 이름으로 인용한 것에서 고려 때 문인들이 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락국기’가 아무 근거도 없이 자의적으로 ‘대당서역기’의 ‘아유타국’을 허황후의 본국이라고 적었을 리는 없다. 현재 인도 북부의 아요디아를 ‘가락국기’의 아유타국으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은데, 과연 그러한지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 옛 선조들의 공간 개념, 즉 역사의 무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광대했다는 사실은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말해준다.

얼마 전 방한한 인도의 모디 총리는 ‘고대 인도 공주가 한국에 와서 김수로왕과 결혼했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인도에서도 이 이야기가 퍼져나가는 중이다. 아유타국에서 가야로 시집온 허황후가 2,0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13억 인구의 대국 인도와 혈연적 동질성을 갖게 하는 재료가 되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의 인연 하나가 후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깨닫게 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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