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와 경쟁한다는 것은 착오
소수집단을 위한 실험성으로 승부
수용자들에 다른 무엇을 보여줘야
본격 문학에 매진하는 작가 발굴
“이 땅의 문화를 황폐화하는 악성 시장논리에서 멀찌감치 해방된, 문학적 자립과 자율이 보장되는 문학 공간.”
소설가 이인성, 시인 김혜순, 문학평론가 성민엽, 정과리 등이 발기인으로 나선 ‘문학실험실’의 출범 선언문이다. 4월 대학로 인근에 사무실을 연 이 문학 공동체의 소명은, 신자유주의 논리에 포섭된 문학이 그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방주 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근 신경숙 표절 논란을 볼 때 이는 대단한 시행착오일지 모른다. 신씨 논란과 함께 불거진 ‘문학 권력’의 중심에 순문학 헤게모니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3대 출판사가 작가 등단부터 책 출판, 문학상 수상까지 돈과 명예를 전부 틀어쥐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문단이 선호하는 순수문학 외엔 차별과 소외를 겪어야 했다는 비판은 한국 문단을 바라보는 명백한 도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인성 소설가에 따르면 순수문학이든 장르문학이든 ‘대중문화로서의 문학’은 오래 전에 끝났다. 디지털 문명과 상업주의로 인해 문학이 이미 대중문화의 변두리로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문학이 다른 대중문화와 상업적으로 경쟁해야 한다고 여기는 건 착각이라는 것이다. 8일 문학실험실에서 만난 그는 “ 순문학 옹호라든지 미문주의 같은 건 90년대에 이미 끝난 얘기”라며 “지금은 문학이 문학으로 살아남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씨가 말하는 문학의 방향은 대중에 소구하는 서사성 강한 소설이 아니라 소수집단을 위한 본격문학?실험문학이다. 내용 상으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형식 상으로는 문법 파괴, 서사 파괴, 극도로 사변적인 문체 등을 수용한다. 이씨는 “스토리는 소설이 아니더라도 어디에나 있다”며 “문학 수용자들이 다른 대중문화로부터 취할 수 없는 무엇이 문학에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실험실은 잡지 발간, 문학패 수여, 정례 문학포럼 개최, 책 출판을 통해 이 일을 하고자 한다. 9월 창간되는 반연간 ‘쓺-문학의 이름으로’는 출판사로부터 독립된 문학전문지다. 이씨를 포함한 발기인들이 문학과지성사(문지)와 오랜 인연이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운영된다. 이씨는 “문지가 아무리 순문학을 선호해도 결국엔 영리를 추구해야 하므로 한계가 있다”며 “문학실험실에선 안 팔려도 좋다는 각오를 하고 우리의 문학적 태도에 맞는 다양한 시도들, 가령 크기가 작은 책, 30쪽짜리 얇은 책, 활자 크기가 작은 책 등을 마음껏 펴낼 것”이라고 말했다. 창간호에는 문학의 본성과 한국 문학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특집 기사가 실린다.
문학패는 고 김현 문학평론가의 이름을 따 ‘김현문학패’로 지었다. 고인이 일관되게 옹호했던 문학의 실험정신을 기준으로, 매년 시와 소설에서 작가 한 명씩을 선정해 상패와 창작지원금(시 1,000만원, 소설 1,500만원)을 준다. 수상자 나이도 김현 선생이 타계한 나이인 만 48세 이하로 한정했다. 9월 열리는 포럼에서는 김현 25주기를 맞아 ‘김현 비평의 역동성을’을 주제로 한국 문학 비평의 제자리 찾기를 시도한다. 더불어 시장에서 외면 당했지만 꾸준히 본격문학에 매진하는 작가들을 발굴하고 출판 지원도 시행할 예정이다.
‘한국 소설이 재미 없다’는 원성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대중의 오락적 취향을 정죄하는 문학실험실의 행보는 명백한 역행이다. 이는 ‘시대와 불화하는 문학 수용자들의 피난처’라는 강력한 정체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오래 갈 거라는 기대는 안 합니다. 망해도 어쩔 수 없죠.(웃음) 경험은 남을 테니까요. 문학실험실이 순수문학을 고수하고 선호하는 문인과 독자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