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재개발 열풍 비껴 간 곳
2006년부터 테마별 5개 코스 조성… 관광객 크게 늘어 작년에 67만명
청라언덕~화교소학교 2코스 인기, "거대한 노천박물관" 관광객들 감탄
어릴 적 살던 동네의 골목은 모두의 마당이었다. 아이들에겐 딱지치기, 제기차기, 술래잡기를 하던 놀이터였고, 아낙들에겐 함께 밥을 비벼먹으며 오순도순 정을 나누던 사랑방이었다. 비좁은 공간이지만 골목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광장의 역할을 했던 것.
오랜 세월의 더께가 쌓여 있는 골목이 있다. 그저 낡고 허름하다 싶었던 골목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젠 전국, 전세계의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마치 국내외 유명 광장들처럼.
대구 중구의 근대골목길 이야기다. 골목 구석구석에 깃든 사연을 찾아 스토리텔링하고, 사진과 조각, 벽화로 볼거리를 만들었더니 대구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우뚝 섰다.
대구는 한국전쟁의 포연이 비껴간 곳인데, 특히 대구의 중구는 1990년대 이후 몰아친 재개발 열풍마저 피해간 곳이다. 그 덕에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금까지 흔적과 생활상이 비교적 온전히 보전돼 있다. 대구 중구청은 2006년부터 이런 골목길을 주제별로 나눠 묶어 테마가 있는 관광코스로 개발했다.
2009년 3,000여명이던 관광객은 지난해 67만여명으로 폭증했고, 올 들어 5월까지 49만4,413명에 이른다. 그 사이 ‘2012한국관광의 별’, ‘2013 지역문화브랜드대상’ 등을 수상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골목길투어는 제1코스 경상감영달성길부터 제5코스 남산 100년 향수길까지 모두 5개 구간으로 돼있다. 가장 유명한 건 제2코스 근대문화골목이다.
2코스는 보통 계명대 동산병원과 신명여고가 있는 중구 청라언덕에서 시작한다. 선교사주택과 3ㆍ1만세길과 서상돈ㆍ이상화고택을 지나 시내 중심지인 화교소학교까지 1.64㎞에 불과하지만 하나의 거대한 노천박물관이나 다름없다. 제대로 보고 느끼려면 2시간은 잡아야 한다.
청라언덕에는 1905~1910년 사이에 지어진 선교사 주택이 자리잡고 있다. 청라는 푸른 담쟁이로, 지금도 담쟁이넝쿨이 많다. 이 주택은 한식과 양식으로 지었으며, 일제가 대구읍성을 허물고 나온 돌로 지은, 아픈 역사를 간직한 집이다.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 ‘동무생각’의 배경이기도 하다. 신명학교 여학생을 짝사랑한 박태준이 이은상의 시를 받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90계단의 3ㆍ1만세길은 최고의 포토존이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없다. 계단을 내려와 큰 도로 건너편에서 좁은 골목길이 다시 시작된다. 담벼락에는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국권회복을 꿈꾼 민족운동가 서상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의 모자이크 초상화와 벽화, 시 등이 그려져 있다. 재개발 위기를 모면한 서상돈, 이상화 고택이 나란히 붙어 있고, 옛 제일교회와 약령시, 종로ㆍ진골목을 거쳐 화교소학교까지 격동기 대구 근대문화의 속살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도심 한복판이다 보니 코스 주변에 커피숍과 음식점, 백화점이 즐비해 투어 자체가 즐겁다.
골목투어 제1코스 경상감영달성길은 돈(money)길이다. 경상감영공원에서 향촌문화관과 북성로, 오토바이골목, 삼성그룹의 태동지인 삼성상회 등을 거쳐 달성토성(달성공원)까지 3.25㎞ 구간이다. 달구벌의 기원과 조선시대 행정중심도시로서의 면모, 근대 산업 발전의 근간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특히 대구의 모든 돈과 쌀이 모여든다는 북성로의 옛 영화를 떠올리며 ‘부자 되는 꿈’을 꾸는 것도 나름 재미를 더해준다.
경상감영공원은 조선시대 때, 지금의 대구 경북 부산 경남 울산을 관할하던 감영(도청)이 있던 자리에 조성한 공원이다. 우리나라에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관아건물인 경상감영 정청(政廳)인 선화당과 도시간 거리를 나타내는 도로 원표 등이 있다. 요즘은 실버세대의 휴식처로 변했다.
공원 서쪽 바로 옆에는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건물을 리모델링한 대구근대역사관, 대구경북 최초의 경찰서인 대구중부경찰서와 유치장을 리모델링해 만든 경찰역사체험관이 있다.
돌아 나와 향촌문화관을 거쳐 시작하는 북성로는 1970년대 후반까지 대구 최고 번화가였다. 일제 강점기 때 대구읍성이 헐린 뒤 몰려든 일본인들은 대구 최초의 포장도로로 신작로를 냈다. 조경회사, 목재회사, 목욕탕, 곡물회사, 석유회사, 철물점 등이 번성했다. 일제가 식민지수탈을 위해 놓은 경부선 대구역이 가까이 있었던 것이 일조했다. 해방 이후에는 문화와 사교의 거리로, 한국전쟁 때는 일대 다방을 중심으로 전시문학을 꽃피웠다. 1970년대에도 섬유기계부품, 양수기, 모터, 농기구, 스패너 등 각종 공구상가가 빼곡히 들어섰다. 북성로 끝자락에서 남쪽 큰 도로변을 따라 가다 보면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상회 터와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고택을 만날 수 있다.
근대골목 5코스 ‘남산 100년 향수길’은 구도심의 맨 얼굴을 볼 수 있는 코스다. 남산동 일대 가톨릭 관련 기념관과 성모당 등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 많다.
대구도시철도 1, 2호선이 교차하는 반월당 작은 골목길에서 시작한다. 얕은 언덕으로 오르게 되는데, 이 언덕이 남산(南山)이다. 산이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지만, 옛 조상들은 산으로 여긴 듯하다. 경상감영에서 봤을 때 남문(영남제일관) 밖 남쪽에 위치했다 하여 남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상에 동화사 포교당인 보현사가 들어오면서 아미산으로도 불렸다. 고층아파트와 재개발을 위해 철거 중인 노후주택이 뒤섞여 있다.
보현사를 비롯 관덕정 순교기념관, 남산교회, 성유스티노신학교, 성모당, 샬트르성바오로 수녀원 등 유서 깊은 건축물이 즐비하다. 성지순례길을 걷는 것처럼 성스럽고 신비한 기운이 느껴진다.
아직 덜 알려진 탓에 번잡함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문우관에서 성유스티노신학교로 가다 보면 지은 지 30년이 넘은 주택들이 이어져 있다. 밥 때가 되면 밥짓는 냄새가 솔솔 난다. ‘원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관광지로 분칠하지 않아 거칠고 투박하지만 가장 진솔한 도시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노인이 대문 앞에 앉아 쌈짓돈을 세는, 그야말로 삶의 현장이다. 사람이 다니며 만든 역사를 걸으며 체험하는 근대골목길 조성 취지를 잘 살렸다는 평가다.
3코스 패션한방길은 대구의 중심에 있는 관광코스로 주얼리타운에서 서문시장까지 패션과 보석, 한방, 전통시장투어까지 즐길 수 있다. 4코스 삼덕봉산문화길은 예술의 향기가 흠뻑 배어 있는 길이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삼덕동빗살미술관,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화랑이 밀집한 봉산문화거리, 대구향교를 거쳐 건들바위까지 4.95㎞로 제법 길다. 특히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은 하천 제방과 주거지역 사이 좁은 골목길에 가객 김광석의 음악과 인생, 벽화 등 예술을 입혀 ‘핫플레이스’가 된 곳으로 유명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대구 중구청을 통해 미리 신청하면 문화유산해설사와 동행할 수 있다.
윤순영 중구청장은 “도심 속 골목이라는 환경을 배경으로 옛 도심이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날줄 씨줄로 엮어낸 답사체험 관광상품”이라며 5개 코스 14.61㎞를 무작정 걷기 보다는 원하는 코스를 집중적으로 둘러 보는 것이 투어의 키포인트라고 강조했다.
대구=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배유미기자 yu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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