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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임금과 신하

입력
2015.07.0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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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8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8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송(宋)나라 곽무천이 편찬한 ‘악부시집(樂府詩集)’이라는 시가집(詩歌集)이 있다. 고대 선진(先秦) 때부터 당(唐)나라 때까지 불렸던 악부시(樂府詩)를 모아놓은 것인데, 그 중 흉노 황제에게 시집가야 했던 한(漢)나라 미녀 왕소군(王昭君)의 한을 노래한 ‘소군원(昭君怨)’이 유명하다. 또한 해하(垓下)에서 한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당한 항우(項羽)가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뒤엎었건만… 우(虞)여 우여 너를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노래했던 ‘해하가(垓下歌)’도 유명하다.

이 두 시가처럼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신발끈을 매어주는 사람’이란 뜻의 ‘결말자(結襪子)’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후위(後魏)의 온자승(溫子昇)이 지었는데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시 ‘결말자’와 제목은 같지만 내용은 사뭇 다르다. ‘결말자’는 ‘제왕세기(帝王世紀)’를 인용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왕(文王)이 숭후호(崇侯虎)를 정벌하러 갈 때 오봉(五鳳) 언덕에 이르렀는데 신발끈이 풀어졌다.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시킬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문왕은 스스로 몸을 굽혀 신발끈을 매었다는 것이다.

그 아들 무왕 이야기가 이어진다. 무왕이 상(商ㆍ은)나라를 정벌하러 은나라 교외 목야(牧野)에 이르러 왼손에는 누런 도끼를 들고 오른손에는 흰 기를 들고 군사들에게 선서하는데 신발끈이 풀어졌다. 그래서 무왕은 흰 기를 놓고 허리를 굽혀 신발끈을 묶었다는 이야기다. 주위에 많은 신하들이 있었지만 자신들은 국왕의 신발끈을 묶어주기 위해서 벼슬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임금의 신발끈을 묶어주지 않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동계(桐溪) 정온(鄭蘊ㆍ1569~1641)의 ‘연보(年譜)’에는 정온이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린 후 시를 지었는데 “간장을 깎아서 짧은 상소를 짓고는/ 대궐문을 밀치고 궁중에 호소했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시 원문의 ‘배달’은 임금 계신 곳의 문을 열어 제친다는 뜻으로 ‘사기(史記)’ ‘번쾌 열전’에 나온다. 한 고조(高祖)가 병이 있다고 칭탁하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10여일 후 번쾌가 문을 열어 제치고 들어가고 대신이 뒤를 따랐는데 고조는 한 내시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번쾌 등이 눈물을 흘리면서 “폐하는 조고(趙高ㆍ진나라를 망친 내시)의 일을 보지 못했습니까”라고 간쟁하자 웃으며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배달의 간쟁’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임금의 옷깃을 잡아당기다’라는 뜻의 ‘인기거’도 마찬가지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신비(辛毗)열전’에 나오는 말인데 문제(文帝)가 기주(冀州)의 사가(士家) 10만호를 하남(河南)으로 옮기려 했다. 때마침 황충(蝗蟲)이 연달아 일어서 백성이 굶주렸기에 여러 관청에서 모두 불가하다고 했지만 문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신비가 조신(朝臣)들과 함께 만나기를 청하자 문제는 이 문제를 꺼내리라 생각하고는 얼굴빛을 바꿔서 불쾌한 표정을 지으니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비는 “폐하께서 신을 불초하다 않으시고 좌우에 두셔서 일을 모의(謀議)하는 관직에 끼게 하셨는데, 왜 신과 논의하지 않습니까. 신이 말하는 바는 사(私)가 아니라 곧 사직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왜 화를 내십니까”라고 따졌다. 문제가 대답하지 않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자 신비가 뒤따라가서 문제의 옷깃을 당기면서 계속 간쟁했다는 일화다.

충신의 반대말에는 간신(姦臣)뿐만 아니라 사신(私臣)도 있다. 신비가 말한 것처럼 사직, 곧 나라의 신하가 아니라 임금 개인이나 권력자의 신하가 사신이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 후한(後漢)의 간신 곡영(谷永)을 비판하면서 “사대부가 처음 벼슬에 나와서 한번 남에게 농락을 당하면 문득 사신(私臣)이 되어 머리를 들 수 없는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집권당 의원 총회에서 원내대표를 박수로 쫓아낸 것에 대해 일각에서 왕조시대의 군신관계로 회귀한 것이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왕조시대의 군신관계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은 조선으로 치면 승정원이고, 수석비서관들은 승지들인데, 조선의 승지들은 임금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는 예스맨들이 아니었다. 임금의 명령이 그르다고 판단되면 그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접수를 거부하고 임금에게 되돌려 주었는데 이를 ‘복역(覆逆)’이라고 한다. 복역(復逆)이라고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복역’이 승정원의 정당한 업무였다는 점이다. 승지들은 임금의 잘못된 판단이나 그릇된 명령에는 ‘복역’하는 것이 국신(國臣)으로서 충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국왕의 비서인 승지들도 이런 상황인데, 국민들이 직접 선출한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승지라고 임금이 복역을 싫어할 것을 몰라서 불이익을 감수했겠는가? 그 길이 내시가 아니라 진정한 선비, 벼슬길에 나온 사대부의 숙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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