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구체적인 협상안 미뤄
유로 채권단 "진정성 없다" 분통
피케티 등 학자들 지원사격에
오바마도 전화로 중재 나서
7일 열린 유로존 19개국 정상과 재무장관이 모인 긴급회의에서 그리스 정부는 기대했던 구체적인 협상안을 제시하지 않아 유로존 채권단의 분노를 샀다. 결국 구제금융 협상여부 결정 시한을 12일까지 연기했는데, 그리스의 시간 끌기 전략이 성공할 수 있을지 전망이 엇갈린다.
그리스 측이 회생계획의 원칙이 담긴 종이 한 장만 들고 회의에 참석한 것을 본 마르크 루테 네덜란드 총리는 “그리스가 협상 타결을 진정 원하는지 비관적”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반면 그리스는 회의 분위기가 긍정적이었다며 여유를 보였다. 유클리드 차칼로토스 신임 그리스 재무장관은 “이날 회의에 진전이 있었으며 유로존 회원국들이 그리스에 새 기회를 주는 정치적 의지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7일 중기 자금지원을 위한 개혁안과 채무재조정을 골자로 하는 그리스 정부의 개혁안을 유로그룹과 유럽이사회에 제출했다”며 “다만 구체적 계획을 담지 않았을 뿐”이라고 밝혔다.
국민투표 전 “국민투표에서 거부가 결정되면 48시간 내에 새로운 개혁안을 제출하겠다”고 공언하던 치프라스 총리가 이처럼 시간 끌기에 나서면서 채권단의 분위기는 점점 싸늘해지고 있다. 반면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독일에게 ‘채무탕감을 허용하라’는 압박도 높아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7일 메르켈 총리와 치프라스 총리와 잇따라 전화 통화를 하고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지 않도록 타협할 것을 주문했다.
거물급 경제학자들도 공동 서한으로 독일의 양보를 요구했다. 7일 외신들에 따르면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 독일 재무부 고위관리 출신 좌파 경제학자인 하이너 플라스벡 등 경제학자 5명은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긴축 프로그램을 재고하고 그리스의 부채 삭감에 동의하라고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지금 그리스 정부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라는 요구를 받고 있으며 총알은 그리스의 미래를 죽일 뿐만 아니라 희망과 민주주의, 번영의 횃불이던 유로존에도 치명상을 입힐 것”이라고 강조했다. 8일 뉴욕타임스(NYT)도 ‘그리스 위기에서 독일이 전후 부채 탕감의 역사적 교훈을 잊다’는 칼럼을 통해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의 외국 부채를 크게 삭감했기 때문에 전후 기적적 경제 회복이 가능했다고 지적했다. NYT는 역사적으로도 오로지 부채가 탕감됐을 때만 경제가 성장하는 패턴이 반복돼 왔는데 이의 직접적인 수혜를 입은 독일이 ‘누구보다 이를 잘 알 것’이라고 꼬집었다.
미래학자 조지 프리드먼은 7일 세계 정세 분석을 통해 “유럽연합에 정말 위험한 것은 그리스가 유로존을 떠나서도 번영까지는 아니더라도 생존하는 것”이라며 유럽연합의 딜레마를 지적했다. 프리드먼은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해도 빚이 청산돼 세계 투자자들에게 흥미로운 투자기회가 될 수 있는 반면 유럽 지도자들은 유로존 결속 약화는 물론 러시아와 중국이 유럽 턱밑으로 진출하는 걸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프리드먼은 수출을 위해 자유무역지대를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독일 입장에서 그리스의 유로존 잔류는 독일을 위한 결정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스 정부도 독일과 EU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어 결국 협상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8일 독일 시사주지 디 차이트의 편집자 조세프 조페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치프라스 총리가 “매우 영리한 치킨게임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최종 승자가 그리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는 “유럽 정상들에게 치프라스 총리는 ‘우릴 압박해봐라. 결국 이는 당신 자신을 압박하게 될 거다. 진짜 당신들의 나라 경제가 붕괴되길 원하나?’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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