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사고에 놀라 까다롭게 바꿔
유해조수 포획 어려워 작물 쑥대밭
민원 빗발치자 지침 완화했지만
"땜질 처방… 총기허가 규제 주력을"
제주시 구좌읍에서 당근과 콩을 재배하는 농민 정동우(53)씨는 요즘 근심이 깊어졌다. 지난달부터 노루 떼가 산에서 주기적으로 내려와 다 키운 작물을 먹어 치우고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있지만 손쓸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다. 정씨는 8일 “몇 개월 전만 해도 소지한 공기총으로 위협해 쫓아버렸는데 규정이 바뀌어 공기총을 경찰서에 맡긴 뒤로는 출고하기조차 어려워졌다”며 “한창 바쁜 농번기에 총을 찾으러 동행할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속앓이 할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올해 2월 충남 세종시와 경기 화성시에서 잇달아 일어난 총기사고 이후 강화된 총기 입ㆍ출고 지침 탓에 농민들만 애꿎은 피해를 보고 있다. 바뀐 규정이 당초 목적인 사고예방과 동떨어진 데다 정작 총기 사용이 필요할 때는 절차가 지나치게 까다로워 탁상행정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경찰은 3월 ‘유해조수 구제용 총기 입ㆍ출고 지침’을 개정하면서 과거 혼자 총을 찾게 한 것과 달리 유해조수 포획단의 경우 2명, 개인 농가는 1명의 ‘참여인’을 대동하도록 총기 사용처 확인 절차를 변경했다. 경찰서마다 하루 출고할 수 있는 총기 수도 20정으로 제한하고 사용시간 역시 최대 자정까지만 허용했다. 총기 반출 과정이 너무 허술해 대형 인명 사고를 예방하지 못했다는 비판 여론을 반영한 조치였다.
엄격한 규정을 마련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불똥은 엉뚱하게 농가로 튀었다. 인구가 적은 농촌에서 참여인을 일일이 찾는 일이 어려울뿐더러 제한된 총기 출고량 때문에 엽사들마저 유해조수 피해 지역을 전부 관리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전국에서 멧돼지 피해가 가장 극심한 강원 영월군은 지침 변경 이후인 3~6월 유해조수 포획단의 출동 횟수가 62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66건)과 비교해 60% 이상 격감했다. 영월군 환경산림과 관계자는 “멧돼지는 야행성이어서 주로 새벽에 출몰하는데 총기사용 시간이 제한돼 있어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며 “참여인 규정 때문에 거주지가 제각각인 엽사들이 3인 구성을 위해 일정을 맞추는 일도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기 포천시 신북면에서 농가를 운영하는 김모(33)씨는 올해 밭농사를 단단히 망쳤다. 봄에는 고라니가 내려와 김장배추와 무를 먹어 치우더니 요즘엔 멧돼지가 고구마와 감자, 심지어 조경용 소나무까지 닥치는 대로 뽑아버렸다. 김씨는 “민원신고를 넣어도 열흘은 기다려야 현장을 둘러보는 상황”이라고 푸념했다. 엽사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야생생물관리협회 경기지부 이인모 사무국장은 “민원이 들어와도 출고 가능한 총기 규모가 정해져 있어 며칠을 허송세월하거나 아예 참여인을 구하지 못해 눈뜨고 피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민원이 들끓자 경찰청은 7일 총기 입ㆍ출고 지침을 다소 완화했다. 포획단은 3인이 아닌 2인 1조로 구성하고 개인 농가는 참여인과 전화 통화만으로 출고가 가능하게 바꿨다. 또 총기사용 시간을 주ㆍ야간으로 유연하게 나눠 야행성 동물에도 대처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규제 자체가 근시안적이며 총기사고 예방과는 거리가 멀다고 입을 모은다. 총기 반출을 감시하는 데만 신경을 썼을 뿐 총을 가져간 다음 정작 어떤 목적으로 활용하는지에 대한 관리는 여전히 전무하기 때문이다. 김철훈 야생동물관리협회 부회장은 “현재 법체계는 거짓으로 둘러대고 총을 빼낸 뒤 얼마든지 사고를 낼 수 있는 구조”라며 “실효성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고 땜질 처방에 급급한 탓에 행정력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도 총기사용이 광범위하게 자리잡은 만큼 사후대책보다 총기허가 요건을 까다롭게 하는 등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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