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버티기'가 끝났다. 지난달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유 원내대표를 겨냥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야 한다"고 발언한 지 13일 만이다. 유 원내대표는 8일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모아진 의견을 받아들여 사퇴를 공식 선언했다. 정치권에 메가톤급 파장을 불렀던 이번 사건을 '기승전결'로 정리했다.
●기: "배신의 정치" 신호탄 쏜 박 대통령
지난달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 시행령에 대한 국회의 수정 권한을 강화한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날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행정 업무를 마비시키고 국가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라며 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안을 의결해 사실상 국회와 전면전을 선포했다.
박 대통령의 화살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향했다. 박 대통령은 "여당의 원내 사령탑도 경제 살리기에 어떤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다"며 유 원내대표를 직접 겨냥했고, "정치는 민의를 대신하는 것이지 자기의 정치 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선 안된다"고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신뢰를 어기고 줄 세우기와 패권주의를 양산하는 배신의 정치는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국정 운영 동반자인 여당 지도부를 공개석상에서 비판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어서, 사실상 이는 유 원내대표를 향한 '사퇴 종용'으로 받아들여졌다. 유 원내대표는 "청와대와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해 송구스럽다"며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사퇴를 거부했다. (▶기사보기)
●승: 집단행동 나선 친박… 유승민 찍어내기 '총공세'
박 대통령의 발언은 새누리당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박 대통령의 발언 소식이 전해진 지난달 25일에 열린 의원총회에서 유 원내대표의 거취를 두고 친박(친박근혜계)과 비박(비박근혜계) 의원들간에 의견이 갈렸다. 격론 끝에 유 원내대표를 사실상 재신임으로 의견을 모았지만 갈등의 불씨는 남았다. 청와대는 여전히 퇴진을 압박했고, 유 원내대표는 연거푸 사과하면서 사퇴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기사보기)
친박은 청와대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유 원내대표가 사퇴하지 않을 경우 집단행동도 불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친박 측은 "당·청 관계가 파국으로 가면 성공한 정부도 못 만들고 총선과 대선까지 망칠 수 있다"며 유 원내대표를 압박했다. 비박 의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초재선 의원 20여명은 유 원내대표 사퇴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내는 등 '유승민 구하기'에 나섰다. (▶기사보기)
유 원내대표 사퇴 논란은 순식간에 친박과 비박의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이번 갈등이 외견 상으로는 당청 관계의 불협화음에서 비롯됐지만, 실상은 내년 총선의 공천권을 놓고 벌어지는 계파간 힘겨루기라는 분석도 나왔다. 친박이 '비박 지도부 흔들기'에 성공해 박 대통령의 당 장악력을 확인하면 총선에서 영향력 행사가 자유로워진다는 지적이다. (▶기사보기)
● 전: 예상 못한 전개… '정치인 유승민' 급부상
유 원내대표에 대한 사퇴 압박이 거세질수록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유 원내대표의 지지율이 크게 오른 것이다. 리얼미터의 6월 넷째 주 '여권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유 원내대표는 4위(5.4%)로 한달 만에 2.0%p 상승했다. 박 대통령에겐 배신자로 낙인 찍혔지만, 민심은 유 원내대표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파동을 계기로 유 원내대표의 중도개혁적인 성향도 재조명됐다. (▶기사보기)
유 원내대표에게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자 친박 의원들은 더욱 분주해졌다.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에서는 유 원내대표의 거취에 대한 얘기를 하는 도중 육두문자까지 오가기도 했다. 당내 계파 갈등이 격화될수록 수적 열세인 친박이 불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친박 핵심인 이정현 최고위원 등이 '유승민 사퇴 반대 성명'에 이름을 올린 의원들을 잇따라 만나 설득하고 있다는 기사도 나왔다. (▶기사보기)
친박의 총공세에 유 원내대표의 버팀목이 됐던 비박 의원들도 하나 둘 돌아섰다. 사퇴 정국이 장기화되면서 유 원내대표 측에서도 "계속 원내대표직을 유지하면 위험 부담이 커진다"며 결단을 촉구하는 의견도 나왔다. 친박과 비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김무성 대표도 '사퇴 불가피'로 가닥을 잡으면서 새누리당 최고위는 8일 의원총회를 소집해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로 했다. (▶기사보기)
●결: 물러난 유승민… 靑·친박 '상처뿐인 영광'
8일 새누리당은 '새누리당의 미래와 박근혜 정권의 성공을 위한 원내대표 사퇴 권고 결의안 채택'을 안건으로 의원총회를 열었다. 김 대표는 의원들의 뜻을 모아 유 원내대표에게 '사퇴 권고안'을 전달했다. "의원들 투표로 뽑혔으니 나갈 때도 의원들 결정을 따르겠다"던 유 원내대표는 의원총회 결과를 수용해 즉각 사퇴했다.
유 원내대표는 사퇴 압박에도 버텨온 이유에 대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 1조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내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가치는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라고 설명했다. (▶전문보기)
'원내대표 유승민'은 물러났지만, '정치인 유승민'에겐 새로운 시작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박 대통령의 '배신자'라는 낙인에도 불구하고, 유 원내대표는 대통령의 비민주적인 사퇴압력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줬다. 보수진영 내 '개혁보수'의 색을 확실히 각인시켰을 뿐 아니라 '자기 정치를 하는 소신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으면서 오히려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 (▶칼럼보기)
유 원내대표도 정치인으로서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유 원내대표는 사퇴의 변에서 "'고통 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겠다. 제가 꿈꾸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하겠다'고 했던 약속도 아직 지키지 못했다"면서 "더 이상 원내대표가 아니어도 더 절실한 마음으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길로 계속 가겠다"고 말했다. (▶칼럼보기)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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