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면 ‘강원도 촌놈’이라고 나를 소개하곤 한다. 촌놈에는 좋은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가 공존하지만, 요리사로 살기에는 촌놈으로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금의 30ㆍ40대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풍족한 시대에 살았다지만, 1970ㆍ80년대의 한국은 먹거리가 요즘처럼 다양하지 않고 문화적인 혜택도 별로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 강원도는 그야말로 시골이었다. 노상 친구들과 산과 들로 놀러 다녔고, 야생 동식물들도 지척에서 접하며 친구처럼 지냈다. 파란 가을 하늘, 맑게 쏟아지는 햇볕, 그 빛을 반사시키며 출렁이던 황금들판…. 그렇게 벼가 무르익을 무렵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셨던 고소한 메뚜기 튀김은 최고의 스낵이었고, 감자나 옥수수는 뛰어다니느라 소비가 많았던 열량을 채우는 데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그 시절 먹었던 감자, 고구마, 옥수수, 메뚜기, 도토리 등의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 늘 자리잡고 있는 맛에 대한 원초적 기억들. 요리사로 경력을 쌓는 동안 여러 나라에서 많은 식재료를 접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어린 시절의 이 맛을 찾기 힘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린 시절부터 좋은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미각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요리사에게 미각이란 시작이자 끝이다. 하나의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 다양한 변수들이 있지만,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미각이 결정적으로 맛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요리를 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잊고 있던 맛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아~, 이 맛이었지!”, “맞아, 그때 할머니가 이렇게 해 주셨었어!” 이런 기억들이 오늘날 요리사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원동력이다.
셰프가 된 이후에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 다니며 공부하고 있지만 울릉도는 특별히 애착이 가는 지역이다. 울릉도는 내게 어린 시절의 ‘원초적 자연의 맛’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이런 울릉도 최고의 음식은 단연 오징어 내장탕이다. 쌀쌀해지는 가을철부터가 제철인 울릉도 오징어. 살아있는 오징어의 내장만으로 끓여내야 하기에 어디에서도 맛 보기 힘든 진귀한 음식이다. 보통 지리로 담백하게 끓여내는데 시원함은 매운탕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오징어의 신선도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비린 맛 때문에 먹기 힘들다. 언젠가는 오징어 내장탕 생각에 울릉도에 다녀온 적도 있으니 이 정도면 나도 미식가라고 불릴 수 있을까?
오징어 내장탕과 함께 잊을 수 없는 울릉도의 맛은 거북손이다. 생김새가 거북의 손을 닮았다고 이름 지어진 이 식재료는 울릉도에서는 전복보다도 귀해서 귀한 손님들이 올 때 대접하곤 하는 음식이다. 한번은 지인인 울릉도의 어부가 바다로 들어가 직접 채취해 그 자리에서 바로 삶아주었는데 ‘바다의 맛’ 그 자체였다. 어떻게 이런 맛이 날까? 짭조름한 바다내음과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은 내가 이제까지 맛본 어패류 중 최고였다. 스페인에서도 거북손(Percebe)은 그 축제가 있을 정도로 최고의 해산물로 꼽히는데, 갈라시아 지방이 유명한 산지로 현지에서도 1㎏에 200유로가 넘는 고급 식재료다.
세상에는 과연 몇 가지 종류의 음식이 있을까?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먹어 치운 음식의 가지 수만 해도 헤아리기 쉽지가 않다. 미각 역시 인간의 본능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맛을 찾게 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립다, 집밥!’ 아무래도 혀가 기억하는 맛보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추억의 맛이 더 그리운가 보다. 맛에 대한 이 그리움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 가고픈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토니 유는 이십사절기 총괄셰프이자 한국슬로푸드협회 정책위원이다. 키친플로스와 런던 주재 한국대사관의 총괄셰프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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