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사박물관이 세워지고 200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자연사박물관인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 개관하면서 한국 박물관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렇게 얘기하면 동감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실없는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자연사박물관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데다가 두 박물관의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자연사박물관이 박혀 있는 내 명함을 받고서 “자연사가 뭐예요”라고 묻는 분들이 많다. 자연사는 ‘自然死’가 아니라 ‘自然史’이지만, 장난기가 발동하면 “사고사나 병사가 아니라 자연사한 생물을 전시하는 곳입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물론 이 농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많은 분들이 농담을 재치 있게 받아준다. “자연사 좋네요. 나도 자연사하고 싶어요.” 그러면 나는 정색을 하고 말한다. “정말로 자연사하고 싶으세요? 동물의 세계에서 자연사는 잡아 먹히는 것 아니면 굶어 죽는 것인데요?”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은 평화롭고 온화하다. 푸른 초원과 꽃, 사슴과 폭포수, 풀에 달린 이슬을 먹고 있는 달팽이. 그린벨트, 유기농 식품 같은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자연은 잔혹하다. 멀리서 본 풍경은 아름답지만 들여다보면 냉혹이 지배하는 곳이다.
실제 자연의 모습을 몇 장면 소개하겠다. 벌레부터 시작해보자. 박쥐 전문가인 댄 리스킨이 쓴 충격적인 생태계 보고서 ‘자연의 배신’에는 이름처럼 예쁘게 생긴 보석말벌 이야기가 나온다. 보석말벌은 바퀴벌레 몸 속에서 일생을 시작한다. 어미 말벌은 바퀴벌레를 침으로 쏘아 마비시킨 후 둥지로 끌고 와 그 안에 알을 낳는다. 말벌 애벌레는 부화되자마자 옴짝달싹 못하는 바퀴벌레의 몸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갉아먹는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부위는 내장이다. 자연에서 먹고 먹히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끔찍하게도 애벌레가 성체 말벌이 되어 바퀴벌레 몸을 뚫고 나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바퀴벌레는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그제서야 바퀴벌레가 죽는다. 이게 자연사다. 우리가 보는 자연은 반쪽 짜리 허구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2층에는 박물관이 자랑하는 ‘한국의 상어’ 코너가 있다. 여기서 가장 인기 있는 상어는 흰배환도상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체 길이의 절반이나 되는 날렵하게 뻗어나간 꼬리가 아주 멋지기 때문이다. 관람객이 상어의 매력에 푹 빠져들 무렵 진실을 알려준다. 흰배환도상어는 알이 아니라 어미 배에서 태어난다. 알 대신 자궁에 있는 알주머니에서 새끼가 자라는 것이다. 배아들은 자라면서 어미 뱃속에 있는 달걀 노른자 같은 난황에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자원은 부족하다. 가장 먼저 자란 첫째 새끼 상어는 어미 뱃속에서 다른 알주머니를 먹는다. 그것도 모자라면 나중에 태어난 동생들을 먹는다. 결국 태어나는 새끼는 두어 마리에 불과하다.
파충류는 죽을 때까지 자란다. 따라서 악어의 크기에서 우리는 악어의 나이와 집단 내 서열을 알 수 있다. 악어 집단에서 서열 1위와 2위의 몸집 차이는 상당하다. 그렇다고 해서 서열 1위 악어의 사냥기술이 뛰어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악어들은 물속에 들어가 숨을 꾹 참고서 영양 같은 먹잇감이 접근하기를 지루하게 기다린다. 목마른 영양이 다가와 물을 먹는 순간, 악어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 달려든다. 하지만 실패의 연속이다. 악어가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영양 역시 온 힘을 다해 피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다 소모한 악어는 이제 한참을 쉬어야 한다. 아주 가끔 먹잇감을 무는 데 성공한다.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 몸을 프로펠러처럼 돌리면서 먹잇감을 익사시키고 이제 뜯어먹을라치면 햇볕을 받으며 휴식을 취하던 서열 1위 악어가 다가와 빼앗아간다. 배신이다. 낮은 서열의 악어들은 반항하지 못한다. 덩치의 차이가 워낙 큰데다가 사냥하느라 이미 에너지를 다 소진했기 때문이다. 결국 서열 1위 악어는 점점 더 커지고 서열이 낮은 악어들은 항상 배고프다.
사자도 마찬가지다. 암사자들이 죽어라 사냥을 나가서 어쩌다 한 번 성공하면 숫사자가 가장 먼저 맛있고 소화 잘되는 내장을 파먹는다. 배신이다. 암사자와 새끼사자들은 어찌하지 못한다. 숫사자와 다른 사자들의 영양 차이는 점점 커진다. 하지만 숫사자도 언젠가는 이빨이 빠지고 만다. 이빨 빠진 숫사자는 하이에나 떼의 밥일 뿐이다. 같은 집단의 사자들이 지켜주지 않는다. 동물의 왕국에는 우두머리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틋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 집단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동물의 왕국은 배신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자연에 평화로운 죽음이란 없다. 그것이 바로 자연사다.
인간은 가장 비자연적인 동물이다. 아무리 잔인하다고 하더라도 살아있는 소의 내장을 파먹지는 않으며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서 한배에서 자란 쌍둥이 동생을 잡아먹지도 않는다. 인간사는 기본적으로 계약과 신뢰로 이루어져 있다. 설사 배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물의 왕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하면 배신이라고 할 수도 없다.
동물의 왕국에서는 오직 서열 1위만이 행복하다. 서열 1위도 언젠가는 처참하게 자연사하고 서열 2위가 그 자리를 차지하며 그 역사는 끝없이 반복된다. 인간 사회가 동물의 왕국과 다른 것은 서로 존중하고 공정한 규칙 안에서 경쟁하고 협력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국이 재미있다고 인간 사회마저 동물의 왕국처럼 만들면 안 된다. 자연을 반면교사로 삼고 인간 사회를 더욱 명랑한 곳으로 만들려고 고민하기 위해 필요한 곳이 바로 자연사박물관이다.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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