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촬영 중에 그는 “상반신 위주로 찍어주세요”라고 말했다. “저 다리 짧은 거 아시잖아요”라며 웃기도 했다. 사람 좋은 미소로 연이어 포즈를 취했다. 6일 오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류승룡은 언제나처럼 소탈한 성격과 말투로 기자를 맞았다. 그는 9일 개봉하는 영화 ‘손님’으로 지난해 ‘명량’ 이후 1년 만에 스크린을 찾는다.
‘손님’은 독일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착안한 영화다. 6ㆍ25전쟁 직후 악사 출신의 남자 우룡이 아들과 함께 세상과 단절된 한 오지마을을 우연히 찾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우룡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지렛대로 인간의 이기와 탐욕, 권력욕구 등을 들춰낸다.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이념으로 사람에게 낙인을 찍던 당대의 어두운 시대상도 반영한 공포물이다.
김광태 감독의 장편데뷔작으로 이성민 이준 천우희 등이 류승룡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류승룡은 아픈 아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억울한 처지에 놓인 우룡을 연기했다. 그는 희극과 비극을 오가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연기력을 보여준다. 다음은 일문일답.
-결말이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영화다. 시나리오로 접했을 때와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느낌은 어떤가?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 영화 ‘이끼’와 ‘웰컴투 동막골’과 비슷해 보였는데 3분의 1 지점부터 굉장히 새롭고 독특한 부분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본 뒤 기분도 마찬가지다. ‘이끼’ 등의 기시감을 관객들이 가지는 동시에 새로움을 느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연기를 했다.”
-영화에 대한 만족도가 어떤가?
“글쎄. 어렸을 때 녹음된 내 목소리 들으면 어색했듯이 내가 출연한 영화는 항상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의 의도와 다르지 않은 작품이 나온 것은 확실하다.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 연기를 했다. 어쨌든 내가 가장 집중해서 연기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모습이 내 능력이고 한계다.”
-이 영화를 선택한 구체적인 동기는 무엇인가?
“어떤 자극이나 충격으로 사람이 돌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이국적인 소재를 우리의 산골로 옮겨왔을 때의 이질감과,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공감이 섞인 영화라 독특하게 느껴졌다.”
-우룡은 순수한 듯하면서도 세태에 찌든 인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낙천적이면서도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살을 찌웠다. 세태에 찌들었다기보다 아픈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몫을 정당하게 요구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개봉한 액션영화) ‘표적’을 찍기 위해 체중을 65㎏까지 낮췄다가 이 영화를 위해 82㎏까지 늘렸다. 평소 몸무게는 74㎏ 정도다. 다른 배우들에 비하면 그리 심하게 체중 조절을 한 것은 아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라면만 먹고 살을 불리는 등 몸을 혹사시키지는 않는다.”
-영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으나 우룡은 다양한 사연을 지닌 인물로 여겨진다.
“우룡에 대해선 감독님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은 편이었다.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했으니 의지를 많이 했다. ‘전쟁통에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 등의 대사에 우룡의 사연이 녹아있다. 유일한 피붙이에게 정을 쏟는 것도 특별한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보편적인 부모의 생각으로 연기를 했다. ‘7번방의 선물’과 배경은 달라도 부모의 마음은 똑같다고 생각하며 촬영에 임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와 ‘7번방의 선물’ ‘명량’ 등 연이어 1.000만 영화에 출연했다. 상업성 높은 영화를 보는 선구안이 남다르다는 평가가 따른다.
“그런 영화만 골라 출연한다는 생각은 오해다. 작품이 좋아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우연히도 그렇게 됐다. 나뿐 아니라 감독님, 전체 스태프가 고생하다 보니 1,000만 영화가 나왔다. 나는 연기가 좋아서 배우가 된 것이지, 배우가 되면 유명해지고 좋아지겠구나 해서 연기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출연작도 마찬가지다. 어느 영화에 출연할 때 영화상이나 유명 영화제 출품을 생각해서 하진 결정하지도 않는다. 하다 보니 감지덕지하게도 좋은 기회가 생긴다. 광고도 마찬가지다. 이 얼굴과 5등신인 이 몸, 이 나이에 내가 광고 출연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열심히 하다 보니 보너스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작품 선택 기준은 무엇인가?
“연극할 때부터 생각해온 게 있다 연출가와 작품, 돈 중 하나만 충족돼도 출연하겠다고. 오태석 이윤택 선생님 같은 좋은 연출가의 작품에 출연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 좋고 셰익스피어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을 해도 가치가 있다. 가장으로서 생활을 해야 하니까 돈도 무시를 못한다. 영화 쪽으로 옮겨와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감독에 좋은 작품 그리고 물질적인 것까지 만족시켜주는 삼위일체 작품이라는 더할 나위 없다. 요즘은 위 두 개나 세 개가 겹치는 작품이 많아져서 좋다.”
-광고도 많이 하고 있는데.
“그것도 오해다.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된다. 통신 광고랑 배달 관련 앱 광고 정도다. 통신 광고는 워낙 방송이 많이 되고, 배달 앱은 영화처럼 혼신의 연기를 해서 강한 인상을 남겼나 보다. 요즘 내 이미지가 과도하게 소비되고 물질만능의 배우처럼 비쳐지는 듯한데 나보다 광고 훨씬 많이 하는 배우들이 꽤 된다(웃음). 나의 본질이자 마음의 고향은 영화 등이다. 지금도 작품 고민이 가장 크다.”
-여러 영화에 출연해 다작 배우 이미지도 강하다.
“다작 배우라는 이미지도 오해다. 소속사 대표가 가장 억울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출연한 영화는 1년에 두 개나 하나 정도 개봉한다. 그런데 개봉한 영화들이 극장에 오래 걸려 있었다. 행복한 일이긴 한데 소속사 대표는 ‘그래서 많이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하더라. 근 4년 동안은 1년에 한 두 편 꼴로 출연작이 개봉했다.”
-‘명량’에선 조연이었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는 이유가 있나?
“특정 장르나 비중에 집착하는 게 한국적인 특징이라 생각한다. 난 그렇지 않다. ‘고지전’에서의 인민군 장교처럼 잠시 나오나 인상이 강한 배역이 얼마나 좋나? 조연 중에서도 좋은 배역이 있으면 당연히 해야 한다. (‘명량’의 일본군 장수) 구루지마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냐 하는 기쁜 마음으로 했다. 최민식 선배 같이 긴장감과 설렘을 주는 배우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논버벌퍼포먼스 ‘난타’ 공연을 오래하다가 떠난 이유가 뭔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 똑 같은 공연을 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래도 일종의 국가대표라는 생각으로 계속 공연을 했다. ‘난타’를 통해 얻은 것이 많다. 여러 나라를 돌면서 배운 점이 많고 코미디의 타이밍을 익힐 수 있어 좋았다. 너무 오래 하다 보니 대사도 하고 싶고 말도 하고 싶었다. 그 때 그만두지 않았으면 못 그만 둘 것 같았다. 그래서 과감하게 그만 뒀다. 주변에서는 많이 만류했다. (‘난타’가 아닌 다른) 연극을 하면서 고정수입을 받기는 어려웠으니까. 그만 두고 나서는 장진 감독의 연극 ‘웰컴투동막골’에 출연했고 그 이후 실직 상태로 보냈다. 막노동을 3년 정도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를 하게 됐다.”
-영화를 찍기 전 김광태 감독이 약속한 게 있나?
“감독님이 출연 섭외를 할 때 후회하지 않는 작품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는데, 안 지켰다. 농담이다(웃음). 일종의 반어법이다. 이러면 또 오해를 사게 되려나.”
-스타가 된 뒤 지인들과 연락을 잘 안 한다는 부정적인 보도도 나왔다.
“글쎄 매화나무는 계절에 따라 꽃이 피고 매실을 맺는다. 때론 파란 잎을 가지고 있고 가지에 눈을 얹고 있기도 하다. 아무리 계절이 바뀌어도 매화나무는 매화나무다. 사람들은 ‘매화나무가 변했어’라고 말하진 않는다. 이런 모습도 저런 모습도 그냥 (예전의) 나인데 사람들이 나보고 변했다고 한다(웃음). 누군가 안동에서 촬영 중 화장실 나올 때 같이 사진 안 찍어줬다고 어느 기사에 댓글로 올린 적도 있다. 사극 촬영 중이라 수염을 붙여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정말 행동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이돌 출신 배우 이준과의 호흡은 어땠나?
“이준은 이제 정말 배우다. 그처럼 순박함과 탐구심, 열정을 지닌 젊은 친구를 본 적이 없다. 그처럼 내게 질문을 많이 하는 경우도 못 봤다. 몸과 마음이 다 건강한 친구다. 좋은 배우로 성장할 재목인 것 같다. (‘같은 소속사이지 않나?’라고 묻자) 아, 그런가요(웃음)? ‘손님’ 촬영할 때 진지하게 물어보니까 아낌 없이 내가 아는 한 노하우를 전해줬다. 연기를 가르친 건 아니고 연기에 임하는 자세를 가르쳤다. 그런데 앞으로 이준이 연기를 못하면 내 탓하려나?(웃음)”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