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00여종 원유 시료 분석, 점도와 성분 비율 등 특성에 따라
배합비율과 공장 운전 조건 설정… "불순물 적당히 섞여야 괜찮은 원유"
“좋은 원유는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원유 품질이 너무 좋으면 경제성이 떨어지거든요.”
SK에너지 울산공장의 석유품질관리팀에서 20년 넘게 원유 감별사로 일한 엄주필 선임대리는 ‘좋은 원유’를 묻는 기자에게 손사래를 쳤다. 좋은 원유는 불순물이 적어서 품질은 우수하지만 그만큼 비싸기 때문에 무작정 도입하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그는 “정제시설과 기술만 뒷받침되면 불순물이 적당히 함유돼도 가격이 저렴한 원유가 경제성 측면에서 오히려 더 낫다”고 강조했다.
한동안 수출 감소로 어려움을 겪은 정유업체들에게 중요한 것은 좋은 원유가 아닌 경제성 높은 원유다. 수 많은 원유 중에 경제성 높은 원유를 골라내는 원유 분석에서 정유업체의 한 해 농사가 갈린다. 정유업체의 두뇌 격인 원유분석실을 찾아가 봤다.
원유분석실은 보물창고
SK에너지의 울산공장은 일일 정제능력이 84만배럴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세계 각지에서 수입하는 원유를 선별해 경제성 높은 원유를 골라내는 과정은 쉽지 않다.
중동과 미국, 북해, 아프리카, 러시아,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생산되는 원유는 나라별, 지역별 생산광구에 따라 색깔, 점도, 성분 비율이 모두 다르다. 여기 맞춰 나눈 원유 종류는 수백 가지가 넘는다. 정유업체들은 이를 가공해 액화석유가스(LPG) 휘발유 등유 경유 벙커씨유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한다.
당연히 석유제품을 생산하는 정제과정도 원유 성질에 맞춰 온도, 압력 등 운전조건을 바꿔줘야 한다. 엄 대리는 “이를 무시하고 원유정제시설을 가동하면 생산효율이 떨어지고 오염물질 배출도 많아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다양한 원유를 안정적으로 정제하기 위해서는 수입 원유를 사전에 정확하게 분석해야 한다. 국내에서 가장 다양한 유종을 수입하는 SK에너지는 원유들을 물리적 화학적 실험을 거쳐 각각의 특성을 구분하고 있다.
이 같은 작업을 수행하는 곳이 원유분석실이다. 이 곳에는 세계 각지의 원유 시료를 보관하는 저온창고가 있다. 창고에 들어가 보니 시료 명칭과 수입지역, 채취일자가 적힌 병이 가득했다. SK에너지가 들여오는 전세계 300여종의 원유 시료가 이 곳에 모두 보관돼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원유라고 하면 시꺼멓고 끈적한 기름을 떠올리지만 참기름처럼 찰랑거리며 노란색을 띠거나 붉은 색이 도는 원유도 있다. 엄 대리가 시료 병을 가리키며 “붉은 색은 카타르 유종”이라며 “중동 원유 수입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수입선이 다변화되면서 저온창고에 쌓일 시료 병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엄 대리와 같은 원유 감별사는 SK에너지에 모두 6명이 근무하고 있다.
운명을 가르는 파일럿 플랜트
원유분석실 한 켠에 자리잡은 특수유리로 감싼 실험기기도 눈길을 끌었다. 정유공장의 핵심설비인 상압증류탑을 축소해 옮겨 놓은 파일럿 플랜트로, 원유를 여기 투입해 실제와 똑같이 생산하는 실험이 진행된다.
실험실에서 20리터 원유를 집어넣으면 정제과정을 거쳐 10개 시료 병에 서로 다른 물질이 쏟아진다. SK에너지는 시험을 통해 얻은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원유 배합비율을 조정하고 공장의 운전조건을 설정한다. SK에너지 관계자는 “원유분석실 자료에 오류가 생기면 공장운영이 어려워질 수 있어 1%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원유분석실에서 원유 시료를 정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통상 5,6일 정도 걸린다. 하지만 성분을 완벽하게 분석하려면 3주 정도 필요하다. 특히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원유도 늘어나고 있어 도입 여부를 결정하려면 사전 분석이 더욱 중요하다. 잘못된 분석으로 배럴당 1달러만 높게 수입해도 전체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엄 대리는 “원유 감별 분석자료가 축적되면 향후 수입할 원유의 정보를 미리 파악하거나 가격분석까지 사전에 할 수 있어 협상에 유리하다”고 전했다.
이처럼 원유 종류별 성분 분석을 전담하는 원유 분석실이 정유업체의 안정적 경영을 위한 출발점이라면 생산능력을 좌우하는 높은 기술력은 최종 목표다. SK에너지 관계자는 “전세계 어떤 원유를 들여와도 고부가가치 석유제품을 생산하는 능력이 바로 기술력”이라고 강조했다.
울산=강철원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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