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외교전 끝에 강제노역 명기 성과
일본 내 조선인 강제노역 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둘러싼 한일 외교전은 막판까지 치열했다. 한국은 1940년대 조선인 강제노역 사실을 명기한 결정문을 얻어냈고 희생자를 기리는 정보센터 설치 약속을 받아내는 성과도 거뒀다. 정부는 한일 교섭 끝에 협의점을 도출했다는 점에서 한일관계 개선의 전기가 마련됐다는 입장이나, 일본 측은 한국의 외교 공세에 불편한 기색이어서 난관도 예상된다.
한국 정부의 외교전은 지난 3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에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시설 23곳 등재 권고 결정을 내리면서 본격화했다. 결정이 확정되는 7월 세계유산위원회(WHC) 회의를 앞두고 한국은 일본을 제외한 19개 WHC 위원국에 전방위 외교전을 펼쳤다.
정부는 5만7,900여명의 조선인이 일하다 94명이 사망한 사실이 있는 시설 7곳의 경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반대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었다. 그러나 ICOMOS 권고를 무시할 수도 없다는 위원국들의 여론을 반영, 등재 결정문에 조선인 강제노역 사실을 담는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지난달 26일 WHC가 열리는 독일 본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일본과 막판 협상을 벌여왔고 4일로 예정됐던 등재 심사를 하루 늦추면서 일본을 압박했다. 정부가 특히 주력했던 것은 ‘강제노역(forced to work)’이라는 문구를 담는 부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계속해서 난색을 표시했으나 WHC 의장국 독일의 역할이 주효했다. 독일이 등재 심사까지 미룰 가능성을 비치며 압박에 가세하자 일본도 5일 결국 강제노역 문구 반영에 동의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역사적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반영돼야 한다는 우리 원칙과 입장을 관철시켰다”며 “그 과정에 있어서도 한일 양국간 극한 대립을 피하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형식 면에서는 결정문 본문에 이런 내용이 담기지 않고 주석으로 처리하는 등 한국이 양보했다. 또 2017년 12월까지 일본이 정보센터 설치 등의 후속조치를 취하기로 했지만 이를 강제할 수단이 없다는 점도 정부가 추후 노력할 대목으로 꼽힌다. 특히 일본이 2012년부터 세계유산 등재 노력을 벌여왔는데도 정부는 지난 3월에야 뒤늦게 외교 총력전에 돌입한 아쉬움도 존재한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꼬여왔던 한일관계는 지난달 22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와 세계유산 등재 절충으로 해빙기를 맞았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협상, 8월 아베 신조 총리 담화 등 한일관계 악재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한편 일본은 세계유산 등재가 확정되고서야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해당 지방자치단체들은 전날 줄줄이 취소시켰던 축하 행사를 이날 저녁 재개했다.
대포를 주조하던 니라야마 반사로(反射爐) 유적이 있는 시즈오카(靜岡)현 이즈노쿠니시는 오후 9시부터 심의 과정을 중계하며 축하 이벤트를 벌였다.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와 하시마(端島ㆍ군함도) 탄광 등 조선인 관련 시설 5곳이 있는 나가사키(長崎)시 측은 후속 조치에 대해 “논의 중인 게 없다”고 함구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송은미기자 mys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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