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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얀 후스… 화형 100년 후 종교 개혁의 불씨로 부활

입력
2015.07.0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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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얀 후스(Jan Hus)가 프라하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던 해인 1393년,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자비의 여름’이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시판한다. 최소 15번 교회를 나가 매번 헌금하고, 15번째‘죄 사함’ 기도 땐 1~14차 헌금 총액만큼의 돈을 한꺼번에 내면 그 때까지 행한 모든 죄를 용서해주는 ‘상품’이었다. 교구민에 대한 세금과 11조 외에도, 술집 여관 도박장 운영 수익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미성년자에게 고위 성직을 준 뒤 급여를 가로채는 이른바 유년 성직서임…. 면죄부는 중세 교회 부패의 결정판이었다.(김장수 저 ‘체코의 역사’참조.)

후스는 1398년 프라하대학 신학부 교수가 되고 3년 뒤 성직자 안수를 받은 뒤 이듬해 대학 신학(철학)부장이 된다. 마카엘 교회와 베들레헴 성당 설교자로도 활동했고, 37세 되던 1409년 프라하대학 총장이 된다. 그의 빠른 출세는 영민함과 대중적 지지 덕이었지만, 그 때까지 그의 교회 비판이 표나게 매섭지 않았거나 로마의 권력핵심을 겨냥하지 않은 덕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전복의 혁명가가 아닌 온건한 개혁가였다. 종교권력에 삿대질하며 눈을 부라리기보다는 시민들에게 바른 신앙관을 심어주는 일을 중시했다. 성경과 찬송가를 체코어로 번역해 직접 읽게 했고, 라틴어뿐 아니라 체코어로도 설교했고, 체코어 철자법도 개혁했다고 한다. 하지만 완고한 원칙주의자였다. 로마 교회가 아니라 성서가 종교의 유일한 권위여야 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1412년 교황 명령으로 모든 교회 활동을 금지 당한 후스는 남 보헤미아의 들판과 거리에서 설교했다. 라틴어로 쓴 야심작 교회론을 발표한 게 그 무렵이었다. “교회는 위계 없는 평등한 공동체여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위에 있다”는 게 책의 요지였다.

콘스탄츠공의회가 소집된 건 책이 나온 직후인 1414년 10월이었다. 후스는 신성로마제국황제 지그문트의 신변 보장 약속을 믿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친 채 공의회에 참석했고, 12월 6일 투옥된다. 그는 교황 비판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고 용서를 빌라는 요구를 거부했고, 이듬해인 1415년 오늘(7월 6일) 화형 당했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교황과 교회 폐습을 지적한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인 건, 그로부터 약 100년 뒤인 1517년이었다.

후스의 정신을 계승해온 체코형제복음교단은 그의 600주기 기념행사를 준비해왔다. ‘예장뉴스’에 실린 요엘 루믈 교단 총회장의 후스 소갯말에는 청빈 근면 순결 도덕 절제 등 수많은 미덕들과 더불어 “난폭함을 거부하였으며”라는 구절이 나온다. 루터가 본받지 않은 유일한 미덕이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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