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산골에 들어왔으니 농사를 좀 지어보세”하며 얼마간 도지로 밭 한 뙈기를 얻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자투리 텃밭에서 이것저것 심어 따먹기도 하고 뜯어먹기도 하였지만 어엿하게 구획정리 된 그럴듯한 밭이 생긴 것은 처음이다, 늙은 아버지에게 호미자루 넘겨받은 아들, 드디어 곳간 열쇠를 받은 며느리처럼 우리 부부는 신기하고 약간 설레기도 했다.
아직 갈아엎지도 않은 밭에는 벌써 머리를 꼿꼿하게 쳐든 붉은 수수가 일렁이고 넝쿨 무성한 고구마가 한밭 가득이었다. 아내의 머릿속에는 진짜 참기름을 달라고 깔깔거리는 친구들 얼굴이 어른거려서 내게는 망망한 이 운동장을 소출이 모자라는 좁은 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괭이, 삽, 낫을 챙겨 들고 밭으로 첫 출근을 했다. 밭머리에서 내려다 볼 때는 까짓 것쯤이야 건방을 떨었는데 막상 삽을 들고 밭으로 들어서니 저 끝에서 몽롱하게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고 현기증이 올라왔다. 엄두가 안 나는 일이 생기면 ‘한 숨 자고 나서’가 특기인 습성대로 계곡 바위에서 한 잠 잘 생각부터 나는 걸 그래도 첫 날인데 하고 참으며 고랑을 파서 이랑을 만들기 시작했다. 백 삽도 못 뜨고 뒤부터 쳐다보니 앞길이 막막한데 하늘의 땡볕은 왜 그렇게 따가운가?
수건 쓴 아주머니들이 당나귀 팔러 가는 사람 보듯 지나가고 경운기에 관리기를 싣고 털털거리며 가는 아저씨는 때가 어느 땐데 삽으로 밭을 갈고 있냐고 어린 애 흙장난 보듯 씩 웃는다. 한가한 건널목 차단기 올라가듯 허리를 펴고 내리며 쉬엄쉬엄 하는 삽질이 그래도 일이라고 뱀 같은 밭이랑이 하나 둘씩 늘어갔다. 농부의 일이란 이렇게 묵묵한 것이라 생각하며 삽을 꽂아 놓고 밭둑에 앉는다.
아버지는 평생농부를 졸업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릴 때, 학교 가는 것만큼이나 한결같이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밭에 계신 아버지한테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학교 가는 것보다 좋았다. 막걸리 반 되가 든 양은 주전자와 김치보자기를 들고 바랭이풀 우거진 숲길을 걸어 아버지의 밭으로 갔다. 아버지가 무심히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면 나는 딴청부리고 송충이가 가득 달라붙은 소나무를 쳐다봤다. 두 번째 잔을 남겨 아버지는 아들에게 먹였다. 오다가 홀짝거린 것을 합친다면 어떤 때는 내가 먹은 술이 더 많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술동무가 되었고 아버지의 밭에서 나온 참깨와 고추와 감자와 고구마로 농부가 되지 않기 위한 교육을 샀지만 나는 지금 아버지 없는 빈 밭으로 돌아왔다. 땡볕 아래 홀로 밭을 매던 아버지를 위로해주던 멧새 소리와 흘러가는 뭉게구름 마른 흙을 긁는 호미소리가 나를 평화롭게 해준다. 나는 부자가 되기 위해 산골에 온 것이 아니다.
요즘 텔레비전의 귀농 프로를 보면 으리으리한 비닐하우스에 전자동시스템을 갖춘 농장 수준의 부자 농부들 이야기가 많다. 리포터가 그들을 따라다니며 성공을 찬사하는 동안 카메라는 고급승용차와 저택 같은 집에서 싱싱한 야채로 고기파티 하는 장면을 비춘다. 분명 성공이다. 그러나 한 성공의 방법을 모든 사람들이 꿈꾸고 부러워할 거란 생각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귀농이나 귀촌이 무슨 드림은 아니지 않는가.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외연을 축소하고 빈약해져 가는 자신의 내연은 확장시키고자 하는 이는 전원생활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비록 내 소유의 한 뙈기 밭이 없을 지라도 대지는 씨앗 뿌리는 자의 마음 헤아려 양분을 주고 비는 때맞춰 그들을 키우고 햇볕은 영글게 한다. 지금 시대엔 허무맹랑한 말이지만 “어떻게 어머니인 대지를, 저 공기와 바람을, 팔고 살 수가 있는가?”라고 말한 인디언 추장도 있었다. 지금 내가 씨 뿌린 곡식을 거두어서는 평생 그 땅을 살 수 없을 지라도 그 곡식으로 굶지 않고, 등기 없는 저 자연을 얻는다면 나는 가난하지 않다. 내가 깃든 봉화가 물질 아닌 꽃을 받드는 마을이면 좋겠다.
정용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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