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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명 한 곳에 몰아넣고 학살"… 생생한 그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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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명 한 곳에 몰아넣고 학살"… 생생한 그날의 기억

입력
2015.07.0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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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오하두흐 학살서 생존한 90세 할머니

“살아있는 한 진실 밝히는 투쟁 계속할 것”

“세월호 피해자들에 위로보다 연대의 손길을”

평화기행단이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몰살당한 오하두흐 마을의 생존자 쓰농 할머니(휠체어에 앉은 이)의 안내로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된 마을 곳곳을 둘러보고 있다.
평화기행단이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몰살당한 오하두흐 마을의 생존자 쓰농 할머니(휠체어에 앉은 이)의 안내로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된 마을 곳곳을 둘러보고 있다.

프랑스 중부 내륙의 오하두흐 쉬흐 글란(Oradour-sur-Glane)은 ‘순교의 마을’로 불립니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6월 10일 나치친위대가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한 곳으로,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돼 당시 참혹한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희망나비 평화기행단은 지난달 29일 이 마을을 찾았습니다. 캠핑장에서 무려 420km. 우리는 새벽밥을 해 먹고 점심도시락을 준비해 서둘러 길을 나섰습니다. 행여 피곤한 운전자들이 졸기라도 할까 봐 무전기를 연결해 노래를 부르고 자료집도 읽어주며 5시간을 달린 끝에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도시락부터 꺼내 그늘진 곳에 돗자리를 펴고 둘러 앉았습니다. “보나뻬띠!” 최고의 반찬인 맹렬한 시장기에다 지나던 주민들이 엄지를 척 치켜들며 건네는 정겨운 인사가 더해져 밥맛이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마을 한 켠에 자리한 박물관에 도착하자, 학살 당시 생존자인 아흔 살의 까미유 쓰농(Camille Senon)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존엄과 평화를 향해 멀리 한국에서 오신 여러분들을 만나 정말 좋습니다.”

우리는 할머니의 안내로 마을 곳곳을 둘러보았습니다. 평소 할머니를 존경하는 그 지역의 노동조합 활동가와 주 의회의원, 프랑스코리아친선협회 관계자, 할머니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촬영팀도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전차가 다니고 주변 도시에서 아이들을 보내는 학교가 네 개나 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이곳 오하두흐는 나치군대의 무자비한 학살과 방화로 폐허가 됐습니다. 공식 집계된 희생자만 642명, 살아남은 사람은 채 10명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도 부모와 친척들 25명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학살 생존자인 쓰농 할머니의 삶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할머니와 희망나비 평화기행단의 만남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학살 생존자인 쓰농 할머니의 삶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할머니와 희망나비 평화기행단의 만남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나치친위대가 남자들을 무리 지어 벽으로, 카센터로, 와인가게로 몰아넣었습니다. 카센터의 차를 밖에 내놓고 사람들을 들여 보냈습니다. 몇 평 되지 않는 공간에 사람들이 머리만 내놓고 꾸역꾸역 들어갔고, 총살이 시작됐지요. 총살된 시신 밑에 깔려 산 사람들도 죽음으로 내몰렸고, 그들은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모든 건물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이 마을의 건물들에는 지붕이 없습니다. 할머니는 “폭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총격과 방화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여성과 아이들은 교회에서 학살당했습니다. 400명이 넘는 여성과 아이들을 작은 교회에 몰아 넣고 수류탄을 터트린 뒤 쓰러져 신음하는 이들을 총으로 마구 쏘았습니다. 그리고는 역시 불을 질렀죠. 수류탄이 터진 뒤 교회 뒤쪽 2층 창문으로 뛰어내린 여성이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뒤따라 창을 넘었던 어머니와 어린아이 둘은 총격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여성도 엉덩이에 다섯 발의 총탄을 맞았지만, 죽은 척 하고 있다가 나치가 사라진 후 풀숲에서 꼬박 하루를 지내고는 다음날 기적적으로 구출됐습니다. 나도 이 분을 통해 그날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40명 가량인 우리 일행이 들어가도 여유가 많지 않았던 이 교회에 4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몰아 넣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회색이었다는 교회 벽은 불에 그을려 붉게 변한 채 곳곳에 총탄 자국이 남아 있고, 천장에 달려있던 종은 녹아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무 살 대학생인 한 단원은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학살 당시 상황이 눈 앞에 그려지고 내가 그걸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한 증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수바엥 뚜아(Souviens-toi)’ ‘리멤버(Remember)’

이후 할머니의 삶을 지탱해 준 것은 오하두흐 박물관에 써 있는 ‘기억하라’는 저 말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할머니는 피해자 유족들과 함께 진상규명을 위한 여러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덕에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됐고, 박물관도 지어졌습니다. 학살 당시 모습 그대로 마을을 보전하기 위해 반대편에 도시를 재건했고 현재 2,400여명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진상규명은 물론 53년 열린 재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냉전에 접어들며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우지 못했고 그나마 기소된 이들도 독일군 7명을 빼고는 알자스 지방 출신들이라 ‘프랑스 내 알자스 차별 문제’로 불똥이 튀며 재판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기억’과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3년 전부터 독일의 의식있는 지식인들이 생존자들의 증언을 찾아 듣는 등 활동에 나섰다고 합니다. 이들은 독일의 쾰른 재판소에 기소를 하려 하지만, 이미 많은 기록과 증거가 사라진 뒤라 ‘증거불충분’으로 계속 거부 당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최근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는 극우의 물결, 역사수정주의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증언이 중요한 힘이 된다고 믿는다며 “살아있는 한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순교의 마을'로 불리는 오하두흐는 1944년 나치의 학살 당시 모습 그대로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 보존돼 있다.
'순교의 마을'로 불리는 오하두흐는 1944년 나치의 학살 당시 모습 그대로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 보존돼 있다.

헤어지기 전 우리는 할머니께 혹시 한국의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알고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예, 압니다.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마음을 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오하두흐 학살 당시 저는 열 아홉 살이었습니다. 그 비극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길은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친구를 잃은 아이들에게 감정적인 위로의 한 마디보다 더 필요한 것은 이런 일이 왜 일어나게 됐는지 진상을 명확하게 밝혀주는 것입니다. 그런 활동을 함께 해 나가자고 말하는 게 그 아이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오하두흐 마을의 풍광과 할머니의 말씀은 우리들 가슴 속 깊숙이 자리하며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리키고 있는 듯 했습니다.

희망나비 유럽평화기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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