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협상, 더 이상 시간 없어
여전히 반성 사과 거부하는 일본
졸속보다는 차라리 결렬이 낫다
지금 미국에서 일제의 위안부 만행을 증언하고 있는 김복동(89) 할머니는 며칠 전 기자간담회에서 노구를 이끌고 태평양을 건넌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고국에 돌아오긴 했지만 우리는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피해자들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김 할머니 말대로 생존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정부에 등록된 238명 중 49명 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 달에만 김외한 김달선 김연희 3명 할머니가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남은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도 88세가 넘고, 90세 이상 할머니도 19명이나 된다. 내년 새해를 볼 수 있는 할머니들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고령이다.
한일수교 50주년에도 양국관계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윤병세 외교장관이 지난달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일본에 가 아베 신조 총리와 기시다 후미오 외무장관을 만난 것도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분위기다. 아베 총리가 윤 장관의 방일 직전 비공개 자리에서 “거 봐라, 기다리고 있으니까 한국 쪽에서 접근해 온 거다”라고 했다는 일본 주간지의 최근 보도는 달라지지 않는 일본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솔한 사과와 반성이 전제되지 않은 만남이니 애초 진전을 기대했던 게 무리였다.
한일관계가 과거사 문제로 파탄 나게 된 원인(遠因)을 찾자면 일제침략과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규명하지 못하고 졸속으로 봉합한 50년 전의 한일협정을 꼽을 수 밖에 없다. 냉전상황과 경제개발이라는 논리에 밀려 일본에 면죄부를 줄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이 통탄스럽지만 어쩌겠는가. “(청구권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협정에 못을 박아 놨으니 이제 와서 일본에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기도 마땅치 않은 게 사실이다.
우리가 일본 정부에 위안부의 법적ㆍ정치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한일협정의 이런 불완전성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극구 주장하는 대로 한일협정이 배상이 아닌 민사상 채권ㆍ채무에 따른 경협자금의 성격이었다면 당시 협정에서 다루지 못한 인권유린 등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 소재는 협정과 별개로 지금에라도 규명돼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청구권에 대한 분쟁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2011년 헌법재판소 결정이나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한 이듬해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렇다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가 어떤 입장을 갖고 협상에 나서야 할지는 분명하다. 위안부 강제성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이 출발점이 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정부가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은 거론하지 않고 금전적 지원을 배상금 성격으로 포장하려는 저자세만이 느껴질 뿐이다.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미국의 요구에 밀려 어정쩡하게 위안부 문제를 봉합하려는 것은 50년 전 안보와 경제를 미명으로 졸속 체결한 한일협정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한일관계 복원을 위해서는 정치권의 결단과 전략적 판단이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무성하다.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북한의 위협 등을 감안하면 과거사에 발목이 잡혀 한일관계를 이 지경으로 놔둘 수 없다는 말은 맞다. 한일관계의 협력 수준 여하에 따라서는 우리가 동북아에서 미중 사이의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인권을 유린당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는 정치적 이해관계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위안부 문제 해결은 할머니들의 한(恨)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미국에서 김 할머니가 “오늘 죽을 지 내일 죽을 지 모르지만 (일본이 사죄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게 억울해 왔다”고 절규하는데 우리 정부가 이를 외면하는 것은 할머니들에게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다. 협상 결렬을 감수하더라도 졸속 봉합은 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할머니들에게 최소한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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