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낙선재(樂善齋)는 조선왕조 24대 왕인 헌종(1834~1849) 때 건립됐다. 오백 년 왕조의 조락(凋落)이 시작되려고 그랬는지, 그 무렵 왕가의 후사도 여의치 않았다. 왕권 강화를 위해 안간힘을 썼던 개혁군주 정조는 일찍이 장자인 문효 세자를 얻었으나 5살 때 죽었다. 그래서 뒤늦게 얻은 순조가 뒤를 이었을 때 나이는 불과 11세였다. 어린 왕을 대신해 영조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해야 했으니, 정조의 왕권 강화책은 물거품이 됐다.
▦ 노론과 외척의 득세를 지켜봐야 했던 순조도 후에 정조를 본따 왕권 강화를 도모하긴 했다. 순조가 아들 효명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 외척 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며 개혁을 도모할 때만 해도 왕조의 기강이 다시 서는 듯했다. 하지만 대리청정 3년여 만에 효명세자가 왕위를 잇지 못한 채 급서하자 순조대의 개혁도 또 다시 무위로 돌아갔다. 헌종은 효명 세자의 아들이니, 세손이 순조의 왕위를 계승한 셈이다.
▦ 8살에 즉위해 할머니의 긴 수렴청정 기간 세도정치의 방자함을 지켜본 헌종 역시 친정에 나서며 선왕들의 꿈이었던 왕권 강화 책무에 눈을 떴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는 낙선재 건립에 정조의 개혁을 이어받고자 했던 헌종의 의지가 투영됐다고 해석한다. 낙선재 자리를 정조가 세운 규장각의 소주합루 바로 옆에 잡은 점, 규장각을 중심으로 정사를 폈던 정조를 본받아 주로 낙선재에 기거하며 서책을 가까이 했던 점 등을 근거로 꼽았다.
▦ 낙선재 바로 옆에 석복헌(錫福軒)을 짓고, 수강재(壽康齋)를 중수해 후궁 출신인 경빈 김씨와 대왕대비를 가까이 머물게 한 것도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는 포석이었다. 왕자를 보려고 후궁을 들인 헌종으로서는 어미의 출신이 장차 원자의 권위에 흠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꿈도 덧없이, 조선은 결국 망했고 낙선재 권역은 덕혜 옹주 같은 왕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머물다 스러진, 망각의 공간으로 전락했다. 문화재청이 낙선재 권역 내 서복헌과 수강재를 개조해 ‘궁(宮) 스테이(stay)’ 시설로 개방하는 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아스라히 잊혀진 왕조의 옛일이 새삼스럽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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