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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성적보다 인성 자본을 키워라

입력
2015.06.3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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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한인소녀 소동은 부모들 경쟁의 단면, 가시적 성과 집착하면 이면에 병 들어

도덕적 일탈 방지하는 심리적 건강 중요

"어릴 땐 좌절 겪어야" 프랑스 육아법이 대세

인성 발달 위해 아이들에게 결정권 넘겨야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당신의 아이는 국내 최고의 특목고에 다니는 수재다. 전교 10등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아이는 부모인 당신이 보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공부만 한다. 유일한 고민이 서울대를 갈까, 하버드대를 갈까인 아이. 이 자랑스러운 아이가 딱해 당신은 늦은 밤, 꾸벅꾸벅 졸며 문제집 채점을 대신 해준다. 시간을 번 아이는 그 시간에 다른 문제집을 풀고, 당신은 부모와 자식 간의 이 협업이 매우 흡족하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했다. 당신이 치명적 채점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맞은 문제를 틀렸다고 채점했고, 틀린 답을 그대로 암기한 아이는 그 문항이 똑같이 출제된 시험에서 점수를 잃었다. 아이는 분노했다. 당신이 사과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성을 잃은 아이는 급기야 당신에게 주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맞는 부모가 된 당신, 어떻게 하겠는가.

도덕 근육 불가능한 압박사회

실제 대치동 학원가의 상담사례였던 이 사건에 대한 객관적 해답은 분명하다. 아이를 완력으로 제어한 채 “공부 이전에 사람이 먼저 되라”고 준엄하게 꾸짖는 것이다. 격한 부모라면 “너 같은 아이에게 공부따윈 필요 없다”며 책과 문제집을 모조리 내다 버리는 퍼포먼스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대개 부모가 아이를 잘 끌고 다니며 ‘관리’해왔다는 것을 뜻하며, 그 과정에서 무수한 회유와 협상, 달래기와 비위 맞추기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부모 주도의 학습과정에서 이미 부모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상태이기 십상이다.

박재원 행복한공부연구소장을 만나 우등생들의 도덕적 일탈에 대처하는 부모의 자세에 대해 물었다. 천재소녀의 거짓말 파동으로 한국사회가 한 차례 들썩이면서, 우등생들의 취약한 도덕근육이라는, 우리 사회가 고민해본 적 없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됐다. 비상교육 공부연구소 소장으로 사교육 1번지 한복판에서 십 수 년간 학생과 부모 상담을 진행해온 그는 경쟁에서 협력으로의 교육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시민단체 아름다운배움 부설 행복한공부연구소로 옮겨 온 부모교육 전문가다. 멀쩡하게 공부 잘하던 고3 소녀가 서류위조로 부모까지 속이며 하버드와 스탠퍼드대 동시 합격으로 신문에 대서특필되기까지, 그 소녀의 내면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천재소녀 소동은 한 개인의 부도덕성이라거나 과대망상이라기보다는 성공한 엘리트를 만들기 위해 부모들이 물불 안 가리고 경쟁을 벌이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주는 사건이죠. 이제껏도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사건입니다.”

박 소장은 “가장 위험한 부모군 중 하나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부모”라고 지적한다. “아이가 적당히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탁월하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아이와 부모의 관계가 달라지고, 그것이 아이의 성장 발달에 심대하고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쉽다”는 것이다. “아이가 공부를 좀 잘한다 싶으면 우리나라 부모들은 거의 정신을 못 차립니다. 아이가 보여주는 가시적 성과가 워낙 뛰어나니까 그 이면에 병들어가는 모습을 놓치기가 쉽죠. 하지만 사실은 그 변화를 부모가 못 느끼는 게 아니에요. 속된 말로 애가 싸가지가 없어지는데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다만 부정하고 싶을 뿐이죠.”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게 다 용서되는 가정ㆍ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의 도덕감은 생성, 발달될 기회가 차단된다.

“아이들 삶의 목표는 평가 아닌 학습이어야”

도덕적인 차원에서뿐 아니라 심리적 건강이라는 측면에서도 아이들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전날까지도 멀쩡하게 가족들과 여행하고 식사하던 우등생 아이가 이튿날 새벽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던 가정을 박 소장은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끊임없이 이기기만 하는 삶의 불안이 야기한 죽음이다.

“평가목표 성향과 학습목표 성향이라는 게 있습니다. 전자는 남한테 인정받는 것, 남보다 앞서는 것이 목표이고, 후자는 내가 뭔가를 배워서 성장하는 것이 목표인 삶이죠. 시험을 봤는데 등수가 떨어졌다, 평가목표 성향의 아이들에게 이건 감당하기 힘든 치명적인 사건이죠. 하지만 학습목표 성향이라면 문제를 많이 틀려도 깨닫고 배우는 바만 있으면 문제가 전혀 안돼요. 인생의 의미가 완전히 다른 거죠. 저는 이게 요새 유행하는 자존감이나 회복탄력성보다도 훨씬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느냐, 이건 아이들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오늘날 부모의 삶이란 사회적 압력이 요구하는 매뉴얼에 따라 끊임없이 소비하는 과정이다. 산후조리원, 성장앨범, 돌잔치, 교구와 전집…. 그 목록은 끝이 없다. “아이의 특별한 인생, 성공한 인생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부모의 마음은 다 사라지고 소비자의 마음만 남게 됩니다. 일단 소비를 하게 되면 부모는 아이를 통해 그 효과를 입증하려고 하죠. 그런데 부모의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아이는 없어요. 있어 보인다면 부모가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은 화살이 아이에게 가서 ‘내가 최고를 선택해 줬는데 너는 왜 효과를 입증하지 못하느냐’ 비난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 왜곡이 생겨나는 겁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육아 트렌드의 대세가 된 프랑스 육아법은 “어릴 때는 좌절을 경험해야 한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회복탄력성이라는 것도 실패와 좌절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개념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는 데 그렇게 사활을 걸면서도 성장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정 정도의 좌절, 그걸 극복하는 경험은 빼앗고 있어요. 육아가 소비와 소비효과의 입증인 사회에서는 아이들 대부분이 압박과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아이들이 잘한다손 치더라도 심리적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 영향을 찾기 어렵습니다.”

인성이 최고의 자본인 네트워킹사회

박 소장은 “우리 아이가 주인공이 되길 원했지만 들러리로 끝나버리는 것은 경쟁구조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며 “성공 확률 자체가 너무나 희박한 게임을 이제는 그만둘 때”라고 단언한다. 대안이 없다는 항변에는 “너무 한가한 얘기”라며 “반드시 대안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잘라 말했다. 중이병은 사춘기의 특질이 아니라 탄생의 순간부터 매뉴얼에 따라 관리 받는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저항을 시작하는 시기가 우연히 사춘기와 겹친 것뿐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부모주도의 의사결정이 당연히 질이 높습니다. 애가 뭘 알겠어요. 하지만 아이가 주도해서 결정하는 삶을 살아버릇해야 선택을 연습할 수 있고, 실패와 좌절로부터 일어설 수도 있습니다. 이제 삶의 화두는 지속가능성입니다. 서울대 출신의 대기업 임원보다 신망 높은 동네 빵집 주인의 삶이 지속가능성과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훨씬 더 양질이 되는 시대가 옵니다.”

그는 이때 가장 중요한 자본이 바로 인성이라고 강조한다. 바른 인성이라고 해서 도덕군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믿을 만한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그게 바로 인성이죠. 모든 것이 네트워크화한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혼자만 전문성을 갖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남을 도울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해요. 그래야 같이 일하는 데 주도권을 쥘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존중한다는 느낌, 그게 바로 엄마들이 그렇게 함양해주고 싶어하는 자존감의 근원이다.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경쟁력은 뛰어나지만 성장이 멈춰버린 유아기의 어른들. 그런 어른으로 자식을 키우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인성이라는 자본에 대해 숙고해봐야 한다.

박재원 행복한공부연구소장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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