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느끼는 것 만으로 충분한데 무리한 선악구조가 흐름 깨
시대상 드러낸답시고 내보낸 박정희, 전두환 영상은 오히려 거부감
지상파 방송의 아침 드라마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다. 출생의 비밀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극한의 선악이 대립하다 끝내 여주인공이 해피엔딩을 맞는, 뻔하디 뻔한 법칙들 말이다. 이런 진부함 속의 단비 같은 존재가 KBS2 아침극 ‘TV 소설’이다. 1987년 1TV에서 시작했다가 제작비 문제로 방영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부활한, 30여년 역사의 드라마다. ‘TV 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1950~70년대 시대상을 그리는 드라마들을 방영한다.
현재 방영 중인 ‘그래도 푸르른 날에’는 평일 저녁 드라마도 넘기 힘들다는 시청률 10%의 벽을 넘기며 그 인기를 증명하고 있다. 1970년대 한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는 이영희(송하윤)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전기다. ‘뒤바뀐 본처와 첩의 딸 찾기’가 이 드라마의 뼈대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70년대 아날로그 삶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 영희는 무조건 열심히 산다. “할 수 있어요!”를 입에 달고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서울로 식모살이를 가고, 그 곳에서 쫓겨나자 시내버스 차장이 돼 어렵게 기숙사 생활을 한다. 70년대 버스 차장들에게 가해졌던 ‘몸수색’, 부당해고, 그에 대한 저항 등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50대 이상 중·장년층에게 남다르게 다가온다. 의류 공장에서 미싱(재봉틀)을 돌리는 시다(보조)로 2교대 근무를 하면서도 야학을 다니며 배움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는 장면도 감동적이다. 화장품 방문 판매 사원이 돼 최고의 실적을 올리는 영희는 마치 내 언니의 일인 듯 느껴진다.
과거 어려웠던 우리네 삶을 충실하게 재연하기만 해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법한데, 안타깝게도 ‘막장 요소’들이 드라마의 흐름을 깨뜨린다. 자기 딸인지도 모르고 괴롭히는 생모(윤해영)와 그것이 밝혀질까 노심초사하는 본처의 딸 정희(정이연)의 악랄함이 그렇다. 이제 막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영희를 훼방 놓으려 화장품 용기 생산업자를 돈으로 매수하고, 원료인 카모마일을 사재기하는 장면은 짜증을 돋군다. 심지어 진실을 알고 있는 친할머니를 미국 땅에 버리라는 정희의 지시(29일 방송)는 패륜적이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공영방송에서 하는 드라마가 맞느냐”고 성토하는 시청자들이 많다.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겠다는 의도로 보이는 장면들도 오히려 거부감을 낳았다. 시내버스 차장들이 농성을 벌이는 장면에 오버랩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처우 개선 발표 영상,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설 등이 그렇다.
‘그래도 푸르른 날에’가 시청자 공감을 끌어내는 것은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 세대가 겪었을 소박한 생활들을 담담히 그려내는 점이다.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황정민)처럼 독일 광부 파견, 월남전 참전, 이산가족 찾기 등 한국 현대사를 대변하는 거창한 인물을 기대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시청자의 심금을 울리는 드라마를 찾았건만 선정주의에 기대려는 제작진이 아쉽기만 하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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