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미술 심리치료
그림 그리며 상처 받은 마음 보듬어
어른들은 바른 관계 형성법 학습
27일 오후 경기 강화도의 한 호텔 회의실. 한 쪽 구석에서 A(4)군이 연방 흰색 찰흙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삐죽삐죽 모양을 내고 조형물을 끼워 넣던 A군이 옆에 있던 이효진(37ㆍ여)씨에게 “티라노사우르스가 달리고 있다”며 무심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순간 이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가 이혼을 앞두고 별거 중인 A군은 현재 미술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 부모가 다투는 모습에 상처를 받은 A군은 치료 초기 엄마, 아빠를 형상화한 인형 다리를 부러뜨리는 등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에 비하면 이날은 많이 호전된 반응을 보인 셈이다. 미술심리 상담위원인 이씨는 “힘이 세고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공룡을 묘사하며 여전히 내재된 분노를 발산하고 있지만 일반 행동을 묘사하는 ‘달리고 있다’는 표현을 쓰는 등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행사에 모인 10명의 아이들은 A군처럼 부모가 이혼을 앞두고 있거나 이혼하는 과정에서 상처 입은 4~13세 아동들이다. 행사에 붙여진 이름은 ‘창문(窓門) 가족공감 힐링캠프’. 아동기관이나 상담시설이 주관한 프로그램 같지만 놀랍게도 미술치료를 기획한 주체는 법원이다. 서울서부지법은 지난해 7월부터 부모가 협의이혼을 신청해 가족 해체 위기에 처한 아동을 대상으로 재경지법 가운데 처음으로 미술심리상담을 해 오고 있다. 서부지법은 심리상담사들의 도움을 얻어 법원 2층에 미술도구를 갖춘 상담실도 운영하고 있다. 이혼가정 자녀들이 미술치료 과정에서 보이는 다양한 행동패턴을 분석하면 단절된 가족관계를 복원하는 단초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법원의 설명이다.
이날 찰흙놀이를 하던 B(4)양은 케이크를 만들어 촛불을 입으로 불어서 끄는 시늉을 했다. 이씨는 부모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투영된 것이라며 “B양이 마음을 연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책상에서 좋아하는 바다 속 생물들이 그려진 석고 조형물을 색칠하던 C(5)양은 “옷 예쁘죠? 여기 입을 때 오려고 산 거예요”라고 중얼거렸다. 아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상담위원 김현민(42ㆍ여)씨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걸었다. 평소 입을 굳게 다물었던 C양이지만 흥미를 느끼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속마음이 드러난다고 김씨는 설명했다.
아이들이 미술로 심리치유를 하는 동안 어른들은 아이와 소통하는 법, 좋은 부모가 되는 법 등을 주제로 한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강의를 맡은 홍우정 서부지법 협의이혼 상담위원은 건강한 부모ㆍ자녀 관계를 형성하려면 부모의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혼 과정에서 부모는 자신의 상처와 입장을 우선시하고 자녀의 고민은 소홀히 하기 쉽다”며 “이혼 절차가 마무리된 후에 아이에게 남겨진 상처를 보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하는 부모가 많다”고 설명했다. 남편과 별거 중인 박모(23)씨는 “남편과 싸우면서 물건을 집어 던질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이가 따라 하는 것을 보고 캠프 참가를 결심했다”며 “부모의 사정과 별개로 아이 입장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여유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이혼남인 조모(43)씨도 “오랜만에 긴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서로의 상처가 보듬어지는 느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법원은 앞으로도 부모와 자녀가 같이 어울리는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이혼 충격에 신음하는 가족의 정서적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이기택 서부지법원장은 “이혼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아이들이 받는 좌절감은 사회에도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며 “물리적으로 이혼을 막을 수는 없지만 법원도 그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ㆍ사진=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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