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를 잊고 싶을 때 이런저런 만화책을 뒤적이곤 한다. 그런데 그게 현실을 잊게 하진 않는다. 외려 현실에서 촉발된 여러 감상이나 단상들이 만화 특유의 사각 프레임 속에서 분할화면으로 육체를 얻는 느낌이다. 문자의 추상성이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눈앞에 구현되는 것이다. 만화책을 한참 보다가 다른 책을 읽으면, 책 속의 문장들이 사람이나 사물의 꼴로 분명해지면서 평소와는 다른 독해가 이루어지곤 한다. 과장하자면, 쓴 사람의 얼굴이나 동작까지도 보일 정도다. 소위 말해 ‘만화 같은 상상’이 실재를 왜곡하는 것일 터이나, 그 왜곡과 과장이 절묘하게도 현실의 심급과 닿아있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분명하게 금 그어진 현실의 한계 너머에서 만화는 그 한계선 아래를 다른 각도로 비추며 현실의 이면을 살피게 하는 것이다.
나는 현실의 일들을 더 멀리, 더 다르게 상상하는 매개체라 여기며 만화를 즐긴다. 그러다 다시 현실을 돌아봤을 때, 현실은 이상하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분명한 현실 속에서 만화는 다시 다른 꿈을 꾸게 만든다. 나는 그게 결코 허황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허황된 건 되레 삶의 여러 이면에 대한 상상력 부재로 ‘말부림’이나 일삼고 있는 현실의 강퍅한 실존인지도 모른다.
올 장마엔 집에 처박혀 만화책이나 뒤적이며 현실 위를 부랑하고 싶다. 물론 라면은 필수, 컵라면일수록 더 좋다. 김밥은 옵션이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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