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인권대표 방문한 날 하늘로
이달만 3명 별세… 생존자 49명뿐
日만행 고발 증인 점점 줄어들어
일본인 교장에 차출돼 日 끌려가
후유증으로 정신병원 치료까지
운명의 장난일까, 위안부 문제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상징일까. 방한 중인 자이드 라아드 알후세인 유엔 인권최고대표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힌 24일 하필이면 피해자 중 한 명인 김연희(83)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또다시 줄어 49명이 됐다. 앞서 11일 생을 마감한 김외한ㆍ김달선 할머니에 이어 이달에만 벌써 3명의 할머니가 눈을 감았다. 위안부 문제 전문가들은 “반세기 넘게 풀릴 듯 풀리지 않은 위안부 이슈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루였다”고 표현했다. 국제사회의 관심에도 일본이 사죄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말 한 마디가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산증인들의 죽음이 안타깝다는 뜻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25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김연희 할머니가 전날 오후 10시쯤 운명했다”고 밝혔다.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다섯 살에 서울로 올라와 공부할 정도로 엘리트 여성이었다. 하지만 소학교 5년에 재학 중이던 44년 아버지가 중국으로 피신했다는 이유로 일본인 교장에게 차출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도야마(富山)현에 있는 항공기 부속 공장에서 9개월가량 일하다 아오모리(靑森)현 위안소에 끌려가 약 7개월 동안 인고의 세월을 감내했다. 후유증 탓인지 김 할머니는 정신병원 치료를 받았고 결혼도 못한 채 한 평생을 홀로 살았다.
마침 김 할머니가 세상을 등진 24일은 한국을 찾은 자이드 대표가 김복동(89)ㆍ길원옥(86)ㆍ이용수(86) 등 생존 할머니들을 만나 “생존자의 육성은 엄청나게 강력(powerful)하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계속 증언해 달라”고 당부한 날이었다. 그의 말처럼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은 국제여론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2007년 이용수 할머니와 김군자(90) 할머니 등은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참석, 일본의 만행을 낱낱이 폭로해 미국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큰 충격을 받은 미 하원은 즉각 ▦위안부 존재의 인정 ▦일본 총리의 공식 사죄 ▦현재와 미래 세대 대상 교육 등의 내용이 포함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용수 할머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국 상ㆍ하원 합동 연설을 하루 앞둔 올해 4월 28일에도 워싱턴 DC 의회 의사당 앞에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집회에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지난 10년 간 세상을 등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84명. 전부 80대가 넘은 고령인 탓에 생존 할머니들의 수는 해마다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비교적 건강 상태가 나은 할머니들은 다시 옷깃을 여미고 있다. 김복동 할머니는 이날 오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 클리블랜드와 워싱턴DC, 시카고 등을 순회하는 12박13일간의 강행군을 시작한 것이다. 김 할머니는 미 국무부 관계자와 면담하고 대학 세미나에도 참석한다. 또 주미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와 일리노이주 평화비 건립 관련 간담회 등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일에는 몸을 사리지 않을 생각이다.
김동희 정대협 사무총장은 “90세에 가까운 할머니들이 언제까지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이제 진짜 시간이 얼마 없는 만큼 할머니들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도록 온 국민이 합심해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주희기자 jxp93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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