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주일대사를 지낸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은 24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종전 70년 담화에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반성 유감 사죄의 뜻이 포함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 전 장관은 이날 서울 종로구 동아시아재단 이사장실에서 진행된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가해자였던 일본 입장에서 많은 고통을 준 아시아 국민들을 위한 메시지가 되면 피해 받은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화해가 이어져 8ㆍ15 담화의 의미가 커질 것”이라며 이 같이 말했다. 공 전 장관은 또 “지난 2년 반 동안 한일 양국 간 정상회담이 없었던 게 상징하듯 양국관계는 저점에 와 있다”며 “가장 빠른 시일 내에 한일정상회담이 개최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_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 양국 정상이 교차 참석하면서 한일관계에 물꼬가 트였다.
“엊그제 행사는 대단히 좋은 일이었다. 양국 정상들의 관계 개선을 위한 의지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 행사를 계기로 한일관계가 여러 가지 발목 잡힌 일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지금 한일관계는 역사 인식, 위안부 문제 말고도 더 큰 이익이 걸려 있는 문제들이 많은데 (역사 인식이나 위안부 같은) 그런 문제에 사로잡혀 대국을 그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_최근 한일관계는 악화일로였다.
“2012년 이후 일본에선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반한, 혐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한국 내에서도 위안부 독도 문제로 국민 감정이 자극돼 일본과 마음이 멀어져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최근 여론조사들을 보면 양국 국민감정이 하루라도 빨리 좋아져야 한다고 나온다. 양국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루 속히 이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두 나라 모두에게 커다란 이익이 될 것이다.”
_우선 어떤 작업들이 필요할까.
“일본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냐, 일본에선 한국이 어떤 나라냐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국과 일본은 동북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유일한 두 나라다. 문화적으로 가깝고, 같은 게 많은 ‘동류항’의 나라다. 역사적으로 불행한 시기가 있었지만 지난 2000년 동안의 한일 교류사를 보면 좋았던 관계였던 때가 더 많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고도 10년이 지나지 않아 관계 회복을 위한 사절을 보내 수교하던 것을 생각해야 한다.”
_일본 지도자들의 그릇된 역사 인식 때문에 한일관계가 발전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아베 총리와 주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역사수정주의가 문제다. 아베 담화의 경우 각의 결정을 거치지 않은 총리 개인 담화가 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바라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8ㆍ15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냐. 전후 70년, 한일관계 정상화 50년 시점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한 70년 회고가 됐으면 한다. 가해자였던 일본 입장에서 많은 고통을 준 아시아 국민들을 위한 메시지가 되면 피해 받은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화해가 이어져 8ㆍ15 담화의 의미가 커질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반성 유감 사죄의 뜻이 포함돼야 한다. 직접적이고 쉬운 말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_일본 내 여론은 어떤 편인가.
“일본에선 사죄 피로증이 있다. 역사 인식 문제와 관련해 (아베 담화가 나온 뒤에는) 더 이상 사죄 운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1998년 나온 김대중 오부치 선언, 즉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양국 정상이 서명한 외교문서인데 여기에 일본의 사죄 이야기가 충분히 나온다. 무라야마, 고이즈미 담화 등 역대 내각이 발표한 담화를 봐도 그렇다. 2005년 종전 60주년 고이즈미 담화에도 ‘일본은 옛날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제 국민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입혔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뜻을 표명한다’고 했다. 2010년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에선 ‘한국 뜻에 반한 식민지 지배가 민족의 자긍심에 큰 상처가 됐다.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했다. 이제는 사죄 요구에서 졸업해도 된다. 남이 듣기 싫은 소리를 자꾸 하면 자기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좋아하겠는가. 이 사람들이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우리도 관용을 보일 필요가 있다.”
_1965년 체결된 한일 협정을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 체결된 기본조약 등은 그 나름의 역할을 해왔고 지난 50년 한일관계의 기초가 됐다. 협정 폐기론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당시에도 여러 이슈들에 합의가 이뤄져 체결된 게 아니라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청구권 자금도 경제발전의 종잣돈이 되지 않았나. 만약 65년 당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하지 않았다면 어느 시점에 정상화가 됐을까. 이렇게 지금도 반일 여론이 팽배한데.”
_한일 갈등의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다.
“김영삼정부 당시 위안부 문제를 직접 다룰 때 (한일 협상을 통해) 최소 조건이 충족되면 우리 국민 손으로 따뜻하게 안아주자는 입장이었다. 일본은 가토 담화,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군 관여, 총체적인 강제성 등을 인정했다. 상당 부분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성이 회복됐다고 봤다. 정부 위로금, 생활보조금, 임대주택 지원과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 지원으로 외교적 차원에서는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정대협 등의 반발, 헌법재판소 위헌 판결 등으로 아직 논의가 되고 있다.”
_일본 정부의 사과와 자금 지원 등을 담은 이른바 ‘사사에안’도 거론됐는데.
“일본 자민당 국회의원들은 사사에 안은 민주당이니까 그런 얘기를 했지 자민당은 정부 예산으로 할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분위기였다.”
_일본은 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관련 정부 책임이 완료됐다고 주장한다.
“그런 논리라면 왜 일본 정부가 사할린교포 귀국 교통비를 지원하고 안산에 아파트를 지어주나. 아시아여성기금에는 왜 일본 외무성 예산이 들어간 것인가. 말이 안 된다.”
_위안부 문제 해법은 없는 것인가.
“우리가 마중물을 넣어줘야 한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의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개인적으로는 위안부 협의 관련 일본 측 요구사항을 들어줘도 된다고 본다. (한일 간 합의가 이뤄지면)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도 3ㆍ1운동 발상지인 탑골공원이나 천안 독립기념관에 모셔도 되지 않나. 윤병세 장관도 밝혔듯 이번 합의는 최종적인 것이라고 확인해주는 것도 해야 한다고 본다.”
_독도 문제도 여전히 갈등 요소가 잠복해 있다.
“우리가 독도를 내놓을 수 없는 것처럼 일본의 어느 정치인이 독도를 한국에 양보하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야단을 떠니 오히려 일본에 이롭게 됐다. 옛날부터 조용한 외교를 강조해왔다. 우리가 실효지배를 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렇게 떠들다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_한일 양국 정치지도자들에게 조언을 하신다면.
“한일 양국이 동북아에서 처한 현실에 비춰볼 때 양국이 협력해 지역의 평화 안정 공생의 길을 찾아야 두 나라에 국가이익이 된다. 이는 동맹국인 미국이 원하는 것이다. 우리와 깊은 관계인 중국과 대립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이 지역에서 어느 한 나라가 패권을 추구하면 안정이 깨진다. 1930년대 일본이 패권을 추구하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던 것도 잊어선 안 된다.”
정상원기자 ornot@hankookilbo.com
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은
1932년 함북 명천에서 태어나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58년 외무부에 들어간 후 러시아와 일본 대사를 거쳐 25대 외무장관(1994~96년)을 지냈다. 83년 외무부 정무차관보 시절, 중국 민항기가 춘천에 불시착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 정부 협상 대표를 맡아 중국 측과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대중 외교관계에 물꼬를 텄다. 당시 사건을 계기로 우리 정부와 중국은 6ㆍ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각각 정식국호가 명기된 합의문서를 주고받는 등 양국 관계는 급물살을 탔다. 또 초대 모스크바 영사처장으로 한소 수교를 이뤄내는 데도 역할을 했다. 지난해 한국 외교 50년사를 정리한 저서 ‘나의 외교노트’를 출간했다. 현재 동아시아재단 이사장과 동서대 국제관계학부 석좌교수, 한일포럼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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