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을 넘기다 보니 친구들끼리 만나면 자녀의 결혼이나 취업 문제가 자주 화제에 오르게 된다. 취업이고 결혼이고 술술 잘 풀리는 경우는 드물고 너나없이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게 보통이다. 나 역시 성인이 된 딸이 둘 있는데 맏이는 대학교 3학년이다. 주변에서 말하기를 그 즈음이면 이미 취업준비를 한다고들 하는데 이 녀석은 준비는커녕 벌써 석 달 넘게 사라졌다. 굳이 이름붙이자면 자발적 실종 상태 정도가 되겠다.
지난 봄 학기가 시작할 때 학교에 등록을 하는 줄 알았더니 돌연 휴학계를 냈다는 것이며 게다가 한 해 용돈을 일시불로 달라는 뻔뻔한 요구까지 덧붙이는 게 아닌가. 제 어미와는 어느 정도 이야기가 오간 모양이었는데 혹 내가 반대할까봐 일단 저지르고 본 것이었다. 용돈이 목돈으로 필요한 것은 비행기 삯 때문이란다. 요컨대 비행기 표만 달랑 들고 북미와 남미 일대를 여행하고 오겠다는 거였다. 경비를 벌어가며 일 년 동안 다니겠다는 계획에 아연할 지경이었지만 두 여자에 맞서 입씨름을 해봐야 돌아올 것은 처절한 패배뿐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나는 순순히 그 요구에 따르고 말았다. 전에도 두어 차례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고 미심쩍으나마 영어로 의사소통이 된다는 말을 믿기로 했는데 이번엔 거의 무전여행이나 다름없어 적이 걱정이 되었다.
그런 애비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떠난 이후 가끔씩 소식을 전한다는 게 고작 ‘생존 보고합니다!’ 한 마디면 끝이다. 공짜로 쓴다는 문자가 잘 터지지 않는 건지 애가 탈 때쯤 해서야 겨우 소식 한 자가 오곤 한다. 처음 들어보는 외국의 지명을 검색해보며 속을 끓이다가 하루는 걱정과 우려와 미래에 대해서 사랑을 가득 담은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공력을 다한 글을 읽고 타국에서 눈물깨나 짜내지 않을까 걱정하던 찰나, 문자가 날아왔다. 짧고 간략한, 눈물기가 아닌 짜증기가 배인 한 마디는 ‘인생을 즐기라며?’였다. 내가 언제? 라고 반문하다가 퍼뜩 7, 8년 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한창 사춘기에 들어 공부며 일상에 짜증이 늘던 아이를 위로한답시고 책상머리에 붙여준 글귀가 바로 ‘인생을 즐겨라!’였던 것이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아이에게 미래 따위 걱정하지 말고 늘 현재를 즐겁게 살라는 것이라고, 개똥철학 비슷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굵은 매직펜 글씨가 부적도 아닌 터에 무슨 효험이 있었겠느냐만 어쨌든 아이는 그럭저럭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 말이 딸아이의 진짜 좌우명이 되었을 줄이야.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으니 제 인생을 알아서 즐겁게 살아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기나긴 역사 동안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생산력을 높여온 과정은 일자리를 줄이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었다. 모내기가 끝난 농촌을 예로 들자면 열 마지기 정도의 농토에 예닐곱 식구가 매달려도 예전에는 힘이 부쳤다. 하지만 요즘은 기계로 하니까 혼자서 백 마지기도 거뜬하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이고 보면 일거리가 없어지고 취업할 곳이 없는 게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인류가 오랜 노력 끝에 성취한 축복과도 같은 것이다.
어릴 때 어느 선생님이 먼 미래에는 사람 대신 로봇이 일을 해서 아주 편하게 사는 세상이 올 거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신기하게만 생각했던 그 말이 실제로 이루어진 게 오늘날 아닌가. 사람이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나오는 기술력의 발전은 실로 인류의 숙원이었다. 꿈처럼 이루어진 이 일자리 없는 세상에서 젊은이들은 진정 삶을 즐겨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현재의 사태는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바로 잡느냐에 따라서 우리 시대는 야만과 문명으로 갈릴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딸아이는 또 일주일째 ‘생존 신고’조차 없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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