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30명 12일간 인내 발휘, 날이 밝자 논밭에서 '구슬땀'
마스크 벗고 이웃과 인사, 특산품 판로 회복이 관건
22일 오전 6시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용문리 주음마을회관 앞. 이른 새벽부터 이웃집을 방문하던 중 만난 최덕희(75·여) 이장은 “보름 가까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갑갑했는디 마을에서 메르스 환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응께 얼마나 다행스런지 몰러. 하여간 주민들이 아무 탈 없이 일하러 나강께 기뻐 죽겠네”라며 웃음이 가득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감염 확진 환자가 발생해 출입이 전면 통제된 이 마을은 22일 격리에서 해제됐다. 마을 어귀에는 ‘보성녹차로 이겨낸 메르스, 주음마을 주민들 고생하셨습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곳곳에 내걸렸다.
주민들은 답답하게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고 이웃과 만나 인사를 나누며 반겼고,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일 처리로 분주했다.
농부들은 동이 트자마자 마을 밖의 들녘으로 나가 논에 물을 대고 농작물 손질로 모처럼 구슬땀을 흘렸다. 2주간 학교에 가지 못한 5명의 학생들은 등교 준비에 바쁜 모습이었고 평소 지병으로 약을 복용했던 노인들은 병원 진료를 위해 읍내로 나갈 채비를 했다.
열흘 넘게 봉쇄된 마을은 일상으로 돌아간 듯 했지만 상처는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주민 이광홍(53)씨는 “이양기로 모내기 시즌 한 철 벌어 1년 먹고 사는디 12일 동안 집밖엘 나가지 못헌께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며 “수천만 원하는 농기계 대출금 갚기가 막막하다”고 한숨만 내쉬었다.
보성군도 메르스 여파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봤다. 녹차와 감자 등 지역 특산품 판로가 막혔고 관광객이 뚝 끊기면서 읍내 일부 식당은 아예 문을 닫기까지 했다.
주음마을은 삼성서울병원을 다녀온 이모(64)씨가 지난 10일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이날 오후 7시부터 마을 전체가 봉쇄됐다. 이씨는 전남 지역 첫 메르스 확진 환자로 광주의 한 국가지정 격리병원에서 치료해오다 지난 19일 완치판정을 받았다. 17가구 30명의 마을 주민도 지금까지 의심환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각계각층의 격려와 성원도 큰 힘이 됐다. 전국 20여개 기관과 단체에서 1,000개가 넘는 생필품이 전달됐다. 부녀회장 위원자(74)씨는 “전국에서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며 “면역력 증강에 좋은 녹차를 많이 마셔 효능을 봤다”고 말했다.
마을은 격리 해제가 됐지만 보건당국의 지속적인 관리를 받는다. 군은 이날 마을 구석구석 방역을 하고 청소차량을 동원해 쓰레기와 의료폐기물을 수거했다. 마을회관 앞에는 임시 진료소를 설치해 주민들의 심리치료와 건강상태를 점검했다. 군 보건소는 이달 말까지 매일 한차례씩 마을을 방문해 주민들의 발열 여부 등을 검사하기로 했다.
마을을 찾은 이용부 보성군수는 “주민들이 고통과 불편을 인내하고 따라주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며 “군민의 힘을 한데 모아 침체된 보성을 다시 활성화시키자”고 말했다.
하태민기자 ham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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