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장기계약ㆍ시세 60% 수준 월세
임대차보호법 1년 전부터 파격 행보
서울시 '임대료 안정화 교정관' 위촉
“권리금도 안 주고 나가래요.” “악덕주가 터무니없이 월세를 올려요.”
‘갑질’의 횡포를 논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건물주다. 그런데 이 부정적 편견을 깨뜨린 이가 있다. 서울에서 임대료가 비싸기로 유명한 신촌에서 건물 2채를 보유하고 있는 김성구(53)씨다.
그는 5년 계약갱신권, 권리금 보장 등의 내용이 담긴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통과(올해 5월)되기 1년 전부터 “5년간 나가라는 말을 않겠다” “임대료는 비상식적으로 안 올리겠다”며 세입자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 ‘착한 건물주’다. 지난 16일 만난 그에게 이유를 묻자 “건물주이기 이전에 나도 26년째 장사를 하고 있는 세입자라 불안하고 서러운 그 마음을 잘 안다”고 했다.
김씨는 인생의 절반(26년)을 세입자로 보냈다. 그렇게 쌈밥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2010년 지하철 2호선 신촌역 부근에 주상복합건물 1개층(전용면적 650㎡)과 연면적 297㎡인 3층짜리 빌딩을 샀다.
현재 3층짜리 건물은 사무실과 오피스텔이, 1개층 상점엔 PC방과 커피숍이 들어가 있다. 여기서 다달이 받는 월세가 총 650만원. 이 지역이 역세권인데다 근처에 영화관 등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김씨의 건물의 월세는 주변 시세의 60% 수준에 불과하다는 게 인근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들의 말이다. 게다가 그의 건물은 보증금과 100개월치 월세를 더한 환산보증금이 4억원을 훌쩍 넘어 임대료 인상폭 보호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그런데도 김씨는 임대료 인상에 나설 생각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세입자들과 지난해 5년 장기계약까지 맺었다.
이런 파격 행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그가 세입자로 겪어야 했던 오랜 설움이었다. 김씨는 “1999년 대로변에서 한눈에 보이는 상점의 2층에 쌈밥집을 차렸는데 2002년 건물주가 바뀌면서 월세가 한번에 250만원에서 400만원으로 60%가 올랐다”며 “이후에도 건물주의 임대료 인상 요구는 끊임없었고 결국 이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2011년 다시 터를 잡은 곳이 명물거리 초입. 이곳은 다소 외진 곳이라 김씨가 들어오기 전까지 2년여동안 가게 주인이 5번이나 바뀌었다. 모두 장사가 안돼 6개월을 채 못 버틴 것이다. 이 때문에 이곳 건물주는 김씨에게 “임대료를 안 올릴 테니 장사만 진득이 잘 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사가 잘되자 건물주는 말을 바꿔 지난해 임대료를 올려달라고 했다. 그는 “세입자 입장에선 장사가 잘돼도 임대료 인상 때문에 걱정”이라고 했다.
김씨는 건물주들의 업종 편향도 문제라고 말한다. “대부분 건물주가 깔끔한 인테리어의 커피숍이나 임대료를 안정적으로 챙길 수 있는 대기업 매장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실제 신촌 연세로와 명물거리에서 자리가 좋다 싶은 곳엔 어김없이 프랜차이즈 커피숍, 대기업이 운영하는 화장품 가게 등이 들어서 있다. 주변 공인중개업소에 따르면 명물거리에서 제일 유명했던 부대찌개 가게도 몇 해전 대형 화장품점에 밀려 문을 닫아야 했다. 이러니 영세 임차인들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다.
김씨는 이대로 가다간 특색 있는 상점들이 사라져 대학 상권으로서의 매력이 사라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과도한 임대료 상승에 대기업 매장들이 신촌 거리를 점령하면서 상권이 특색을 잃고 있다”며 “임차인들이 안정적으로 월세를 내고 계약기간을 보장받는다면 가게에 투자도 할 것이고, 능력도 펼쳐 보여 결과적으로 내 건물도 부가가치가 올라갈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런 마음가짐과 노력을 인정받아 김씨는 지난해 3월 서울시로부터 ‘임대료 안정화 교정관’으로 위촉 받기도 했다. 교수, 부동산 전문가, 임차인, 건물주 등 총 10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건물주 대표로는 김씨가 유일하다. 그는 “갑자기 건물주가 임대료를 터무니없이 올리는 등 갈등 상황이 올 때 해당 건물주와 세입자의 조정자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쉽지는 않지만 세입자와 건물주의 상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강아름기자 saram@hankookilbo.com
김정화 인턴기자(이화여대 중어중문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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