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이 기증한 57점 등 재조명展
흑백 사진 속 1970년 프랑스 남부 바카레 항구. 아프리카에서 실어온 높이 10미터, 무게 7톤의 대형 아피통 목재를 끌과 망치만으로 깎아 내려가는 한 남자가 있다. 바로 고암 이응노(1904~1989)다. 그는 사브르미술관의 개관 기념 국제조각심포지움의 초청을 받아 이 작품을 만들었다. 같은 시기에 평면화 ‘구성’ 연작에서 그린, 고대 문자를 활용한 추상표현을 그대로 입체로 구현한 ‘토템’은 이응노가 조각에 쏟았던 열정을 확인시켜 준다.
50대 이전까지는 동양화가로 활동했고, 프랑스 이주 후에는 1950년대 앵포르멜(informelㆍ비정형이라는 뜻으로 감정을 담은 추상을 의미) 운동의 영향을 받아 문자추상과 ‘군상’연작으로 이름을 알린 이응노지만 그의 조각은 상대적으로 덜 조명됐다. 대전 만년동 이응노미술관에서 열리는 소장품전 ‘이응노의 조각, 공간을 열다’는 이응노의 아내 박인경(89) 여사가 새로 기증한 조각품 57점을 포함해 그의 대표 조각품과 관련 자료를 시대별로 정리한 전시다.
조각에는 이응노가 프랑스 이주 이후 천착한 미적 주제가 그대로 투영됐다. 합판 위에 크고 작은 나무조각을 세로로 꽂아 만든 만든 부조에서는 1962년 유럽에 처음으로 이응노의 이름을 알렸던 콜라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나무를 깎아 만든 1970년대 작품에서는 문자추상이, 1980년대 작품에는 인체를 최대한 추상적으로 재해석해 표현한 ‘군상’의 모습이 나타난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갇힌 2년간 만든 옥중작품도 2점 공개된다. 이응노는 재판소에서 받은 나무도시락을 주머니 속에 숨겨 들어와 잘게 조각내고 밥풀로 합판에 붙여 부조를 만들었다. 화장실에서 쓰는 종이와 밥풀을 주물러 만든 덩어리를 찰흙처럼 붙여 세운 ‘구성’을 보면 그에게 창작은 먹는 것보다 절실한 삶의 원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경험 덕분인지 이응노는 주어진 모든 것을 작품 재료로 사용했다. 파리 근교 프레 생제르베에 마련한 그의 아틀리에는 옛 구두제작소였다. 그는 남아 있던 구두 조각을 모아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버려진 장롱의 문이나 프라이팬에 자신의 문자추상을 새겨놓기도 했다. 전시장 한 켠에는 이응노가 조각을 할 때 쓰던 끌과 망치, 버려진 물건을 재활용한 소품 등을 모아 이응노의 작업실을 재현했다. 8월 30일까지. (042)611-9821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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