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동안 이탈자 한 명도 없어
주민들 헌신적으로 고통 감내
동 트자 너도나도 논밭으로
"외부 격려ㆍ지원도 큰 힘 됐죠"
"이젠 농산물 판로 복구가 걱정"
“주민 여러분! 우리 마을 격리를 해제합니다. 이제 읍내에 나갈 수 있게 되었어요. 그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19일 아직 이른 시각인 오전 6시반 전북 순창군 순창읍 장덕리에 성인식(58) 이장의 달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덕마을은 한 주민이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감염되면서 전국 처음으로 마을이 통째 격리됐다가 보름 만인 이날 0시를 기해 해제됐다. 동이 트자 마을은 오랜 만에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하루 전만 해도 마을은 인기척마저 드물어 적막한 폐허마을을 연상시켰다. 이날 주민들은 일찍부터 읍내를 나갈 채비를 하고 마을 밖 논밭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해도 뜨기 전 오토바이를 타고 밭에 다녀온 주민 한모(78)씨는 “갇혀 지낸 게 몇 년이 된 것처럼 답답했다”며 “논밭에도 못 가본 게 젤로 힘들었다”고 했다. 김모(68)씨도 “식전에 읍내 가서 고추 밭에 뿌릴 농약을 사왔다”면서 “정말 징허데, 감옥이 따로 없어 하루가 열흘 같았고만”이라며 즐거워했다. 보름 간 생이별을 해야 했던 김판기(68)씨는 “엄니가 읍내에 사시는데 전화통화만 하다가 이제 얼굴 뵈러 간다”며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권영숙 중앙초등학교 교장은 오랜만에 등교하는 이 마을 학생 4명을 정문에서 일일이 안아주며 위로했다. 격리 해제와 동시에 마을로 통하는 길목 3곳을 지키던 경찰과 공무원들도 철수했다.
장덕마을은 경기 평택성모병원을 다녀온 A(72ㆍ사망)씨가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메르스 마을로 알려졌다. 그러자 전북도와 순창군은 4일 자정부터 가장 강력한 조치인 마을격리를 단행, 사실상 마을을 폐쇄했다. 국내 언론은 물론 CNN 등 외신기자들까지 몰려와 메르스의 위중함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102명의 주민들은 보름 동안 누구도 마을을 이탈하지 않았고, 결국 의심환자는 나오지 않았다. 외부의 격려도 힘이 됐다. 전국 35개 기관과 단체에서 1억원어치가 넘는 구호품이 전달됐는데 면역력을 높이는 데 좋다며 매실과 꾸지뽕 진액, 전복, 쇠고기를 보내준 곳도 있다. 순창보건의료원은 매일 두 차례 주민 발열 여부를 검사하고, 아픈 주민에게 직접 약을 타다 주었다.
‘메르스 마을’이라는 걱정과 상흔은 아직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주민 대부분은 여전히 마스크를 한 모습이었고, 방역 차량은 여전히 골목을 돌며 소독을 했다. 황모(71ㆍ여)씨는 무릎과 허리가 아파 전통 휠체어를 타고 읍내 병원을 찾았지만 물리치료를 거부당했다. 병원 측은 다른 환자들을 의식해 일주일 후부터 가능하다며 돌려보냈다. 피해 의식이 컸던 탓에 상당수 주민들은 취재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격리조치 후 순창지역 농산물 기피현상도 발생했다. 주민들은 복분자와 블루베리, 매실 등의 농산물의 예약 주문이 많이 취소되어 판로를 확보할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장덕마을 격리조치가 알려지면서 순창지역 경제도 날벼락을 맞았다. 순창시장에서 20년째 순대집을 하는 김모(57)씨는 “아예 외지인이 오지 않아 국밥 10그릇을 못 팔 때도 있었다”고 했다. 택시기사 이모(62)씨는 “광주 등 외지에 가서 ‘순창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설설 피했다”고 하소연했다. 마을 찾은 황숙주 순창군수는 “주민들의 헌신적인 협조로 메르스를 무사히 이겨냈다”며 “이제는 남은 숙제들을 풀겠다”고 말했다.
순창=최수학기자 shc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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