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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노쇠해도 존중받는 까닭

입력
2015.06.1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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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늙어서도 대접을 받는다. 꼭 권력이나 재력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가진 건 노쇠한 몸 하나일지라도 어엿한 인격체로서 존중된다. 그런데 무리를 이루고 사는 동물 중에 노쇠해도 여전히 존중받는 종이 얼마나 될까. 아니 인간을 제외하곤 있기나 한 것일까.

‘춘추좌전’이란 책이 있다. 여기엔 전장에서 맞붙은 자성(子城)과 화표(華豹)의 일화가 실려 있다. 자성은 전차를 몰다가 화표와 마주쳤다. 얼른 화살을 메겼는데 화표가 한발 앞서 그를 겨누고 있었다. 순간 자성은, 조상이 날 돌볼 것이라며 활을 내려놓았고 화표의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가슴을 쓸어 내린 자성이 다시 활을 들어 쏘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화표가 재게 화살을 메겨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이에 자성이 고함쳤다. 번갈아 가며 쏘는 것이 예(禮)라고. 그러자 화표는 활을 내려놓았고 자성의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소설이 아니다. ‘춘추좌전’은 춘추시대 역사를 다룬 책으로 유교 경전의 하나였다. 엄연한 사실이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백 아니라 천을 죽여서라도 자기 목숨을 보전코자 하는 전쟁터에서,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예를 지켜 뭘 어찌 하자는 것이었을까.

흔히 예라고 하면 대인관계서 갖추면 좋을 예의범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예의 또 다른 이름은 사회제도였다. 저 옛날 공자 때부터 이미 그러했다. 그의 후예들이 ‘예치’, 그러니까 세상을 예로써 다스린다고 했을 때 그 실상은 공자의 이념과 어울리는 사회제도로 국가사회를 통치한다는 것이었다. 하여 예를 지킨다는 말은 그러한 사회제도를 준수함을 가리켰다. 지금으로 치자면 헌법을 근간으로 빚어낸 제반 사회제도를 따른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예의 준수는 기득권층에게 요구됐다. 이는 공자를 보면 분명해진다. 그는 철저하게 기득권층 또는 그에 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예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반면에 힘없고 생계에 허덕이는 서민더러 예를 지키라고 요구한 적은 없었다. 헌법을 무시하는 이들에게 헌법을 준수하라는 요구가 사회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듯이, 기득권에 기대어 예를 무시하는 이들을 향한 예의 강조는 실은 개혁에 대한 강조였다. 이것이 한자권의 오랜 규범이었던 “대부 이상은 예로 다스린다”는 명제의 요체였다. 여기서 대부는 통치계층을 가리키는데,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강자가 지닌 기득권은 법망을 피해가기에 충분했다. 하여 기득권층에겐 사회제도 전반에 대한 포괄적 준수가 엄격하게 요구됐다.

역으로 기득권층이 예를 잘 준수하면 국가는 물론이고 문명 자체가 순항하게 된다. 동서고금의 역사가 입증해주듯이 문명의 쇠망은 기득권층의 썩음에서 비롯되기에, 기득권층의 예 준수는 문명 유지, 갱신과 직결된다. 여기에 ‘춘추좌전’에 실린 자성과 화표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담겨있다.

전쟁은 왜 하는가? 주로 기득권을 강화하자는 속셈은 감춘 채 나라를 부강케 하려면 어쩔 수 없다며 전쟁을 벌인다. 그렇다면 전쟁이 문명 해체의 계기가 돼서는 안 될 터, 자성과 화표는 설사 ‘나’의 목숨이 소거된다고 해도 문명 유지의 기틀인 예는 보존해야 한다고 여겼음이다. 이미 넘치게 갖고 있음에도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는 요즘 가진 이의 눈에는 그들의 처신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테지만, 저 옛날 사람들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자신이 아닌 문명을 앞세울 수 있는 역량을 ‘기본’으로 갖췄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문’의 힘이다. 사회제도인 예를 지킴은 곧 자신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문명을 앞세울 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젊은 숫사자가 늙은 숫사자를 힘으로 내쫓듯이 하지 않고 노쇠한 이를 존중하게 된 것이다. 예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런 사회는 사자의 무리와 별반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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