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의 현안 논의가 청와대의 ‘국회법 거부권 행사(재의 요구)’ 엄포에 꽉 막힌 형국이다. 전국을 초토화하고 있는 메르스 대책 수립을 위한 당ㆍ정ㆍ청 회의는 물론이고 박근혜정부가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각종 경제입법 논의도 올스톱이다. 새누리당에서는 “이러다 내년 총선 준비도 물 건너 가는 것 아니냐”는 볼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옛 친이계이자 수도권 4선인 정병국 의원은 17일 최고위원ㆍ중진 연석회의에 참석해 “(청와대가) 개정 국회법 문제로 정치의 판을 깨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경고했다. 정 의원은 이어 “청와대가 입법부를 비아냥거리는 것은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권한쟁의심판 청구 등 절차를 밟으면 된다”고 비판했다.
앞서 박 대통령이 1일 “국회법 개정안을 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권 행사 의지를 밝힌 이래 청와대는 수시로 같은 입장을 되풀이하며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위헌성 시비를 줄인 국회법 중재안을 마련한 정의화 국회의장에게도 그 같은 뜻을 밝혔다. 정 의장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어제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거부권 행사를 안하는 게 좋겠다’는 요지로 전화했는데 (이 실장이) 상당히 완강한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앞서 청와대는 유승민 원내대표를 겨냥해 ‘당ㆍ정 협의’에 이어 ‘메르스 당ㆍ정ㆍ청 회의’도 거절한 바 있다.
청와대의 ‘거부권 압박’에 친박계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불만이 나온다. 한 재선의원은 “청와대가 경제입법 등 현안을 주도해야 할 여당 원내대표를 상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원내대표가 운신할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며 “야당과 협상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우려했다.
여권의 국정운영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차기 총선 준비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원내부대표단인 한 의원은 “올해 초 출범할 때 원내지도부의 계획은 상반기에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공무원연금 개혁안,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의 3대 과제를 마무리하고 6월부터는 공약 마련 등 총선 준비에 돌입하자는 것이었다”며 “그런데 ‘거부권 정국’에 몸이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의 노선 개혁의 밑그림을 그리려 유 원내대표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총선정책기획단(가칭)도 진척이 어려운 처지다. 한 핵심 당직자는 “거부권 문제로 난리인 터라 구성조차 못하고 있다”며 “거부권 정국이 끝나야 뭘 해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토로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이후 국회에서 새누리당 주도로 국회법을 부결 또는 폐기시키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지금이야 당ㆍ정ㆍ청 회의 중단이나 총선 준비 차질 정도지만,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여당 내 반대로 재의결 자체가 무위로 돌아간다면 야당의 거센 반발로 사실상 국회는 마비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지은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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