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그스름하게 가지런히 이발한 차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모습, 조밀한 차나무 골이 언덕배기로 층층이 이어진 풍경, 보성 차 밭은 그래서 차보다 멋진 풍광을 카메라에 담는 관광지로 더 유명하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차를 재배했다는 하동 차 밭은 골을 지은 모양이 보성보다는 덜 가지런해 야생차라는 인상이 깊다.
전북 순창에는 차 밭의 전형을 깨뜨리는 진짜 야생 차 밭이 숨겨져 있다. 적성면 석산리 강경마을은 강에서 1km 들어간 벌동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산중인데도 햇살이 따뜻하고 먼 발치로 섬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늑한 마을이다. 차 밭은 마을에서 오른쪽 언덕을 하나 넘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엄밀히 말해 밭이 아니라 숲이다.
숲의 주인이자 자칭 ‘차 숲 디자이너’박시도(50)씨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개망초가 하얗게 핀 묵정밭을 지나 밤꽃 향기 비릿한 숲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도 차 밭을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겉에서 보면 밤나무 참나무 팽나무 자귀나무 때죽나무가 빼곡한 평범한 산일 뿐이다. 차나무는 바로 그 울창한 나무아래 산비탈을 녹색 융단처럼 덮고 있다.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짙은 그늘인데도 싱싱한 차 잎의 윤기가 번들번들하다. 흔히 야생이라고 하면 거칠고 억세다는 느낌이 먼저 들지만 이곳 야생차는 재배하는 차보다 얇고 부드럽고 잎도 넓다.
“밭과 숲의 차이죠. 키 큰 나무들이 지켜주기 때문에 풀과의 경쟁을 피할 수 있습니다. 차나무가 좋아하는 것만 먹으면 토양이 척박해지는데, 숲은 부엽토로 쌓여 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영양을 공급해줄 필요가 없어요.”차나무도 숲의 일부로 자연상태에서 건강하다는 얘기다. 차 숲의 규모는 3만3000㎡(1만평) 정도지만 수확과 가공비를 뺀 순수 연간 관리비는 100만원 안팎이다. 덩굴식물만 조금씩 제거하는 것 외에는 따로 관리하는 게 없다.
같은 규모의 차 밭이라면 2,000만원은 들어간다.
박시도씨가 차 숲을 산 것은 10년 전이다. 20대 중반부터 차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90년대 초 전북의 야생차 군락지를 찾아 다녔다. 그러던 중 1998년 지역신문에 난 ‘오래된 야생차 밭’이 단서가 됐다. 적성댐을 건설하기 위해(주민들의 반대로 다행히 댐 계획은 무산됐다) 생태자원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곳을 발견한 것이다. 이곳 차 숲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백제시대에 강경마을 주위에 6개의 사찰이 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사찰에서 관리하는 차 밭이었을 것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 지금은 절은 모두 사라지고 2곳의 절터만 남아있다.
그가 처음부터 이 숲을 사야겠다고 맘 먹은 건 아니었다. 지인들과 함께 차 숲을 가꾸고 싶었는데 자꾸 ‘돈 되는 자원’으로 개발하려는 기미가 엿보여서 무리를 했다. 당시 평당 시세가 3,000~4,000원이었는데 그는 1만원에 땅을 구입했다. 오랫동안 차 숲을 지켜온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가 이 숲을 산 건 순전히 지키기 위해서였다.
누군가는 여기에 집도 짓고, 편의시설도 갖추라고 하지만 그의 원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산책길만 있으면 된다. 그것도 일부러 길을 내는 게 아니라 오며 가며 저절로 생기는 오솔길이면 충분하다. 욕심이 들어가는 순간 다른 수목들이 희생돼야 하고, 나무들이 훼손되는 순간 이 숲의 가치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가 구상하는 차 숲 활용방안은 나무그늘 아래 너럭바위에 편히 앉아(혹은 누워) 차나 마시며 쉬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차 따는 체험하고 다도체험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제발 그러지 말자고 해요. 도시에서 맨날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굳이 여기까지 와서 부산스럽게 뭘 하려고 하냐고. 그냥 놀아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맑은 공기 마시면서 요즘 말로 힐링 좀 하자고요. 그리고 차 한잔 값을 지불하라는 얘기지” 차 값에는 시원한 그늘과 맑은 공기, 산 새와 바람소리, 건강하게 토양을 지키고 숲을 유지하는 비용까지 포함될 것이다. 건강한 숲을 누리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얼마 정도를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마지못해 입을 뗀다. “한 3만원 받으면 될까?”이 숲의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터무니없는 가격일 수도 있겠다.
차 맛은 어떨까? 그는 “쫀쫀하고 찰지다”고 했다. 차 숲의 공기와 목 넘김의 질감을 함께 표현한 말이다. 차를 덕을 때도 재배한 차가 풀풀 날리는 느낌인데 비해 여기 차는 새순에서 에너지가 살아있는 느낌이란다. 한마디로 격이 다르다는 거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부인이 운영하는 전통 찻집에서 재배하는 차에 비해 30%가량 더 받고 있지만, 수익은 기대에 못 미친다. 아직까지 전주지역의 가난한 문화예술인이 주요 소비자다.
“나 돈 많이 벌어야 해요”라며 웃어 보였지만 그의 방식으로는 당분간 쉽지 않아 보인다. 시대에 뒤쳐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람들은 자꾸 땅값을 물어보는데 제가 살아있는 동안 이 숲이 차 밭으로 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숲의 가치는 시간이 경쟁력이니까요.”자연을 대하고 차를 즐기는 그의 철학은 현재보다 훨씬 ‘오래된 미래’에 닿아 있었다.
강경마을 차 숲은 아직 관광지로 개방한 곳이 아니어서 찾기가 쉽지 않다. 방문하려는 이들은 전주의 전통찻집 다문(茶門, 063-288-8607)에 문의하면 된다.
순창=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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