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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제주 책 읽으며… 앎과 삶이 하나 됐죠"

입력
2015.06.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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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최남단의 독서공동체, 새 삶 꿈꾼 뭍사람들이 시작

같이 책 읽고 삼삼오오 마을기행… 함께하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발전

할망들 수다로 팟캐스트 준비 중, 책으로 시작해 문화지킴이 활동도

제주 서귀포시 남원북클럽 회원들이 책읽기 모임을 가진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타지에서 이주해 온 북클럽 회원들은 함께 책을 읽으며 제주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남원북클럽 제공
제주 서귀포시 남원북클럽 회원들이 책읽기 모임을 가진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타지에서 이주해 온 북클럽 회원들은 함께 책을 읽으며 제주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남원북클럽 제공

책을 혼자 읽는 것과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읽는 것은 다르다. 혼자 읽기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거나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함께 읽기는 삶에 우애를 불러오고 공동의 추구를 형성한다. 오랫동안 책을 함께 읽는 것은 결국 삶을 같이하는 일이다. 책으로 자신을 바꾸고, 가족을 바꾸고, 지역을 바꾸는 아름다운 혁명이다. 함께 읽기로 생각하는 시민을 만들어가는 전국의 독서공동체들을 시리즈 ‘책, 공동체를 꿈꾸다’에서 격주로 소개한다. 책읽기 문화와 독서공동체 확산을 위한 한국일보와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공동 캠페인의 일환이다.

“텔레비전을 더 보려고 귀농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미 있게 살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자기 삶터에 관한 책을 함께 읽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주변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고, 생활에 이어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자기 안에 좁게 갇혀 있던 눈이 생활세계 전체로 확장되면서 삶의 호흡이 무척 깊어집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에는 열일곱 마을이 있다. 면적은 서울의 3개 구 크기지만, 인구는 2만이 채 못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읍 단위로는 소득이 가장 높은 편이다. 자연이 가져다 준 황금의 작물 감귤 덕분이다. 한라산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드넓은 땅 곳곳에 감귤 농장이 펼쳐지고, 말 목장이 곳곳에 둥지를 틀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정지용 시가 문득 떠올랐다. 초록의 들판이 햇빛을 받아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랐다.”

남으로 쪽빛 바다가 맑고, 북으로 한라산이 뒷배를 받치는 곳. 이 아름다운 고을에 국토 최남단 독서공동체 ‘남원북클럽’이 있다. 2011년에 네 명이 처음 시작한 후 한 달에 한 번 모여 같이 책을 읽는다. 그 사이 회원이 스무 명으로 늘었다. 30대부터 70대까지 매번 10여명 이상 참석해 함께 책을 읽고 세상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함께 나눈다.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릅니다. 책은 다루는 대상에 대한 지혜와 통찰이 담긴 시각을 다양하게 제공합니다. 그 덕분인지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하면 자기 말만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함부로 말할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 말을 경청하는 힘도 생깁니다. 무엇보다 책에는 주장을 넘어서는 진실이 있습니다.”

제주 이민자 만남에서 싹이 트다

약속 장소인 남원읍 수협 3층은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에 북카페, 녹음실, 강연장이 들어선다. 북카페는 작은 도서관 겸 북클럽 모임 장소로 쓴다. 녹음실은 팟캐스트 형식이지만 최초로 제주어 전용 방송을 내보낼 둥지다. 제주 할망들이 출연해 수다를 놓으면서, 해녀를 비롯해 제주 여인의 삶을 진솔하게 풀어헤칠 곳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책을 혼자 읽는 것은 쉽지만, 같이 읽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어렵다. 독서 인구가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시골에서는 특히 그렇다. 마음에 맞는 책 친구를 만나기도 어렵지만, 책은 개인 취향을 심하게 타는 편이라 공동 독서 목록을 만드는 것조차 쉽지 않다. 남원읍에는 고등학교도 없고 서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책의 황무지’다.

황무지에 책의 물길을 내고 같이 읽기의 나무를 처음 심은 사람은 안재홍 목사다. 1995년에 제주 토박이인 아내를 따라 귀촌했다. 2002년 서귀포에서 독서 운동을 시작한 이래 꾸준히 독서 확산에 힘을 기울여왔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평소 좋아하던 책을 같이 읽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지역 독서는 지역 교육을 바꾸는 동력입니다. 교육이 바뀌면 사람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올레길을 걸어보면 안다. 제주도는 한반도에 딸린 커다란 섬 이상이다. 우리 곁에 있는 또 다른 세계이다. 헤테로피아, 즉 이국적 풍광과 문화를 갖춘 차이의 공간이다. 따라서 뭍사람이 바다를 건너 제주에서 사는 것은 이주가 아니라 차라리 이민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신라’의 삶을 버리고 ‘탐라’의 삶을 선택하는 결단이다.

2010년은 제주도에서 역사적 전환이 시작된 해다. 역사상 처음으로 전출자보다 전입자가 많아졌다. 삶의 보람을 찾을 시간조차 없는 가혹한 경쟁에 지친 사람들이 대안적 삶의 공간을 찾아 제주로 몰려들었다. 올레길 열풍도 한몫했다. 제주도 곳곳을 걸으면서 이 섬의 매력을 맛본 사람들은 관광객보다 거주민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 타올랐다. 남원읍에도 ‘뭍사람’이 계속 건너왔다.

“남원읍에는 제남도서관이 있습니다. 도서관을 드나드는 분들과 독서 모임을 하려고 근처에 봐둔 자리가 있습니다. 도서관 마당 바로 옆쪽의 공간이었습니다. 괜한 일을 벌이나 싶어 망설였는데, 어느 날 제가 점 찍어둔 자리에 새로 카페가 들어선 겁니다.”

영화 일을 하면서 오랜 뉴욕 생활을 마친 안광희 감독은 인생 후반전의 삶터를 제대로 고르려고 여기저기 기웃대다 마침내 남원읍으로 왔다. 그리고 이곳에 ‘문화공동체 서귀포’라는 카페 같은 사무실을 냈다. 안 목사는 ‘내 자리를 빼앗겼다’는 기분에 실망한 채 무얼 하는 덴가 싶어서 기웃대다가 안 감독과 말을 텄다. 그러고는 이 작은 공간이 작년 말 재개발로 사라질 때까지 네 해 동안 남원북클럽의 양산박이 되었다.

남원북클럽이 교육프로그램으로 진행한 '그림 그리는 해녀' 수업. 주민들이 그림을 배우는 과정은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돼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남원북클럽 제공
남원북클럽이 교육프로그램으로 진행한 '그림 그리는 해녀' 수업. 주민들이 그림을 배우는 과정은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돼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남원북클럽 제공

“앎과 삶이 하나 되는 즐거움”

세상 모든 중요한 일은 만남에서 시작한다. 책으로 친구를 만나고 친구로 세상을 만들려 했던 사람. 막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 하면서 어떻게 좋은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사람. 두 사람은 자연스레 마음이 통했다. 그리고 각자 한 사람씩 보태 네 사람이 책 읽는 모임을 시작했다. 모임이 커진 것은 제주에 귀농귀촌한 사람들이 합류하면서부터다. 때마침 서귀포시에서 ‘책 읽는 서귀포’를 선포하고, 독서모임을 지원한 것도 큰 보탬이 되었다.

“육지에서 귀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생계형입니다. 그에 비해 제주도로 귀농한 사람들은 문화형이 많아요. 실용적 가치보다는 문화적 가치를 추구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문화이민자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입니다.”

남원북클럽은 독서 목록이 특이하다. 제주 ‘이민자’들이 ‘본토박이’들과 어울려 제주도 책을 주로 읽는다. 주강현의 ‘제주기행’, 이영권의 ‘제주역사기행’, 서명숙의 ‘제주올레여행’ 등이 재미와 깊이에서 아주 인기였다.

“모임에는 귀농귀촌한 분이 많습니다. 제주를 새로운 삶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주도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기 삶터를 속속들이 알아야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은 공부했지만, 가까이 제주도는 거의 못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터인 제주도를 깊이 알고파서, 제주도 책을 우선 읽기로 했습니다.”

책모임은 줄거리 길잡이의 발표로 시작된다. 책을 꼼꼼히 소개하면서 생각할 논점을 정리하고 느낌을 이야기한다. 그 후 곧장 토론을 시작한다. 별다를 것 없는 흔한 진행이다. 하지만 제주도 책을 주로 읽으니, 즉시 책의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다. ‘마을독서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제주도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앎과 삶이 하나가 되는 즐거움을 알았습니다. 책을 읽고 삼삼오오 모여 자전거 등을 타고 ‘마을독서기행’을 떠납니다. 그러면 책에서 읽은 세계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어떤 책이 제대로 쓰였고, 어떤 책이 엉터리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책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전혀 떨어져 있지 않다. 책이란 자연의 신호들을 집약하고, 문명의 문자들을 기록해 전하는 것뿐이다. 책의 사개가 물러나는 것은 자연이나 문명이 보내는 1차 정보들과 직접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주도같이 정보가 부족한 곳은 이렇게 책이 나와선 안 된다.

“서너 해 사이에 제주 이주자들이 정착기를 많이 펴냈습니다. 하지만 함께 읽었을 때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 많이 제주를 겪어보고 신중하게 책을 출간했으면 합니다.”

북클럽이 협동조합, 마을기업으로

책을 읽고 삶터를 확인하는 일을 꾸준히 해온 남원북클럽은 모임 한 해 만에 서귀포귀농귀촌협동조합으로 발전했다. 마을기업인 ‘제주살래’를 만들어 감귤 등 지역 특산물을 전국에 판매하고,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한다. 같이 책을 읽고 지역을 답사하다 보니 느슨하나마 ‘함께 삶’을 고민하게 되었다.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가 이곳에서 어떤 공동체로 살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좋은 삶에 대한 가치와 열정도 발견했습니다. 다시 열아홉 살이라도 된 기분이었죠. 같이 힘을 합쳐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협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책을 통한 문화적 소통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소통을 위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오랫동안 책을 읽어온 독서공동체가 봉사 활동 등을 통한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경우는 흔하다. 그러나 남원북클럽처럼 문화 소비를 넘어서 문화 생산으로까지 나아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제주도에는 다른 곳에 없는 독특한 문화가 있습니다. 해녀와 제주어입니다. 제주도의 정체성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상징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남원북클럽에서는 해녀들에게 문화예술교육을 해서 직접 작품을 생산하도록 돕고,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기록 중이다. 첫 번째로 ‘그림 그리는 해녀’ 편이 나왔는데, 해녀들이 그림을 배우고 그리는 과정을 담았다. 휴스턴국제영화제에서 여성 이슈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등 해외에서 반응이 뜨겁다. 두 번째로 지금은 ‘시인이 된 해녀’ 편을 준비 중이다. 해녀들이 글을 배우고 시를 창작해 ‘해녀 시집’을 낼 때까지 과정을 담을 예정이다. 제주어를 살리기 위해 제주어 지역방송을 내보내기로 한 후, 운영 노하우를 배우려고 서울 마포방송국에서 연수까지 했다.

“책으로 시작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 권의 책을 시작으로 사람이 꿈꿀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려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문화에 대한 고민 없이 지역은 성숙하지 못한다. 자기 삶을 스스로 주체로서 기록하지 못하는 세계는 반드시 사멸한다. 독서공동체는 책을 넘어서 문화의 넓이와 깊이를 지역사회에 제공하는 중요한 진지로 성숙할 수 있다. 남원북클럽은 국토 최남단에서 그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장은수ㆍ출판평론가(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

◆ 남원북클럽이 권하는 제주도 책들

제주도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이 책들부터 읽으면 좋다. 제주도 책을 읽고 나면 마을독서기행을 떠나는데, 많은 책들이 현장에 가 보면 실제 제주도와 거리가 멀었다. 추천한 목록은 모두 직접 읽고 현장에서 내용을 확인한 책들이다. 이 책들을 읽고 현장에 다녀와서야 비로소 제주도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제주기행’은 바람, 돌, 여자, 해녀, 귤 등 제주도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을 통해 자연과의 오랜 공존을 통해 독특한 문화적 원형질을 형성해 온 제주도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담아냈다. 강추다.

주강현, ‘제주기행’(웅진지식하우스, 2011)

이영권, ‘제주역사기행’(한겨레출판, 2004)

서명숙, ‘제주올레여행’(북하우스, 2008)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앤북스, 2004)

강문규, ‘제주문화의 수수께끼’(각, 2006)

허영선,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서해문집, 2014)

오성찬, ‘나비와 함께 날아가다’(푸른사상, 2004)

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창비, 2012)

김은미·강창완, ‘제주 탐조일기’(자연과생태, 2012)

현기영, 순이삼촌’(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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