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자녀들 하녀와 수도생활 등
수녀원 쇠락하자 고행 절제 강조
봉쇄 '맨발의 가르멜회' 열어 큰 파문
가톨릭은 보편성으로 번역된다. 바티칸을 정점으로 한 세계 12억5,000만 신자들은 어디서나 같은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며 교황에 순명한다. 일사분란하게 순종한다는 것은 함께 무너질 수도 있다는 뜻. 하지만 부패로 깊게 패인 중세 암흑기를 거치고도 2,000년 명맥을 유지했고, 2008~2013년 5년간 세계 신자 수가 9.4%(1억727만명) 늘었다. 특히 2013년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 포춘지가 선정한 2014년 영향력 있는 지도자 1위에 오르는 등 위세가 더 굳건해지고 있다.
신학자들은 내적 쇄신과 체질개선, 참회가 있었기에 이 같은 가톨릭 아성이 만들어졌다고 꼽는다. 가난한 사제들의 상징인 예수회 출신 첫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소박한 언행에 세계가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이러한 기대감 때문이다. 이들을 이끈 쇄신의 정신은 무엇일까.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주관ㆍ후원한 스페인 영성 순례에 함께해 쇄신가들의 자취를 살폈다.
8일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85㎞ 떨어진 소도시 아빌라. 해발 1,131m의 고지대에 로마시대 성벽이 보존된 고요한 도시 곳곳에 탄생 500년을 맞은 첫 여성 교회학자 성녀 데레사의 초상을 담은 깃발이 너울거렸다.
성인의 도시 아빌라에는 배움을 찾는 영성가들이 몰린다. 가르멜 수도회 총본부 산하 교육기관인 아빌라 소재 신비신학대학원에서만 매년 30~40명의 사제가 데레사의 영성을 공부하고, 영성센터에서도 각종 교육이 이뤄진다.
특히 올해 데레사 탄생 500주년을 맞아 외부인의 발길은 더욱 잦아졌다. 아빌라 주교좌 성당, 성녀의 심장과 팔이 보존된 살라망카 외각 알바 데 토로메스 수도원 성녀 대 데레사 성당, 엔까르나시온(Encarnacionㆍ강생, 즉 하느님이 인간이 되심) 수도원 등을 찾은 순례객들은 저마다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조각 앞에 꽃 등을 바친 뒤 묵상에 젖었다.
성녀 데레사는 엄격한 규율을 적용한 맨발 가르멜회를 세운 인물로 영성문학의 고전인 ‘완덕의 길’ ‘영혼의 성’ 등의 저자다. 귀족의 딸인 그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4세부터 수녀원에서 자랐고, 집안의 반대에도 19세에 아빌라 가르멜 수녀원에서 수녀로 서원했다. 은수(隱修)와 탁발을 강조했던 기존 가르멜 수도회는 14세기 말부터 흑사병의 창궐, 규율 완화 등으로 쇠락했고 귀족 자녀들이 하녀를 데리고 수도생활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 여기에 경종을 울린 것이 1567년 데레사가 세운 맨발 가르멜회다. 엄동설한에도 샌들만 신고 다닐 정도로 절제와 고행을 실천한다는 취지로, 가난 속에 금욕과 기도 생활을 이어갔고, 좁디 좁은 방에서 기도하며 외부와의 만남을 철저히 봉쇄했다. 대신 수도원 안에서 적극적인 음악과 기도, 집필 생활을 권장했다.
일개 수녀가 별도 수도회를 세운 것은 파격적인 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보수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25세 사제 십자가의 요한이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원을 여는 등 그녀의 행보는 많은 수도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맨발 수도회 소속 55명의 수녀가 파문 당하고 십자가의 요한 수사가 동굴 지하실에 감금당하는 등 고난이 거듭됐지만 성녀 데레사는 20년 동안 스페인 전역에 남녀 수도원 17개를 세웠다.
기도의 여정을 1~7궁방으로 정리한 ‘영혼의 성’원리도 정립했다. 1~4궁방은 ▦세속에서 벗어나 ▦감각적인 요소를 버리고 ▦성경을 많이 읽고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며 능동적으로 나아가라는 내용이고 5~7궁방은 고독 속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야 정화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개념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지하 감옥에서 신비 신학의 대작 ‘어둔 밤’등을 토해냈다.
엔까르나시온 수도원에서 만난 다니엘 데 파블로 마로토 신부는 “50년 간 성녀 데레사를 연구해왔지만 아직도 다 이해를 못했다”면서도 “기도를 통해 자기 삶의 가장 큰 보물, 즉 사회와 교회를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찾아냈고 모든 것을 봉헌한 그녀는 배울 점이 많은 인물이자 여성들이 천시되던 시대에 교회의 개혁을 이뤄낸 선구자”라고 강조했다.
살라망카 신학대학원 교수인 그는 여전히 고독과 절제가 절실하기에 데레사의 영성이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신발을 벗는 것을 비롯한 고행은 세속의 욕구들을 떨쳐버리려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스포츠맨들이 음식을 조절하듯 일정 수준 희생을 하지 않으면 누구도 목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에게 오늘날 특히 되새길 데레사의 정신을 물었다. “우리는 필요한 것들이 참 많죠. 하지만 주변의 많은 물건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약도 치료를 위해 필요한 양 이상을 쓰면 마약이나 독약이 되잖아요. 꼭 필요한 것 중에서도 정말 필요한 것을 선별할 줄 아는 영성, 그것이 성녀 데레사가 발견한 기쁨이자 충만이었습니다.”
아빌라(스페인)= 글ㆍ사진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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