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라이벌, 차오스 前 전인대 상무위원장 별세
중국의 차오스(喬石) 전 전국인민대표대회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14일 베이징(北京)에서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이날 "차오스 동지가 지병으로 인해 14일 오전 7시8분께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부고 소식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전인대, 국무원,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의 공동 명의로 발표됐다.
고인은 1987년부터 10년간 ‘최고지도자’급인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냈다. 특히 덩샤오핑(鄧小平) 시대 말기인 1990년대 권력서열 3위인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맡아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리펑(李鵬) 전 총리와 함께 3두마차 체제를 형성했다.
그러나 장쩌민 전 주석과는 총서기직을 놓고 경쟁하다 패했고 장쩌민의 견제에 밀려 전인대 상무위원장 자리를 5년만에 떠나고 퇴임하는 등 인연보다는 악연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은 1989년 6월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계기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 후임 물망에 올랐으나 이 자리는 결국 덩샤오핑이 낙점한 장쩌민 전 주석의 몫이 됐다.
그는 덩샤오핑이 세상을 떠난 1997년 정치국 상무위원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3월 전인대 상무위원장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명분은 나이 제한이었으나 당시 외신과 중화권 언론에선 장쩌민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렸다는 관측이 유력하게 제기된 바 있다.
1924년 상하이(上海)에서 출생한 고인은 16살이던 1940년 일찌감치 공산당에 입당해 젊은 시절부터 지하당 학생운동에 주력한다. 그는 1940∼50년대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시 등 지방에서 근무하다 1963년 4월부터 공산당 대외연락부에서 근무하면서 베이징(北京)에 입성한다. 그러던 중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잔혹한 박해와 격리, 구금 등의 조치를 당했고 2차례에 걸쳐 하방생활도 경험한다.
고인은 문혁이 끝난 뒤 대외연락부로 복귀해 부부장, 부장 등을 지내면서 각국 정당과의 교류 협력의 성과를 냈고 중앙조직부 부장으로서 간부 인사제도를 확립해 당의 건설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고 신화통신은 전했다. 고인은 사법·공안 분야의 수장인 중앙정법위원회 서기와 사정과 감찰을 총괄하는 기율검사위원회 서기도 지냈다.
신화통신은 고인에 대해 "민주법제, 사회치안 강화 등에 심혈을 기울였고 '종엄치당'(從嚴治黨·엄격한 당관리)과 '당풍염정'(黨風廉政·당의 기풍과 청렴한 정치)의 기틀을 닦아 부패에 대한 처벌을 법제화 틀에 포함시켰다"고 평가했다.
이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집권 후에 추진 중인 엄격한 당관리, 반(反) 부패 투쟁, 민주법제 건설의 초석을 제공한 인물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인은 또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 이를 적극 지지하고 개혁개방 사상을 전파하는데 공을 들였다.
1993년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된 뒤에는 헌법 개정과 경제 법안 마련을 주도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법률체계 구축에 기초를 놓았다.
고인은 전인대 상무위원장 재임기간인 1995년 황낙주 당시 국회의장의 초청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고인은 장쩌민 주석, 리펑 총리와 공동명의로 김일성 전 북한 주석 사망 직후인 1994년 조전을 보내 김 전 주석의 사망에 애도를 표시하기도 했다.
신화통신은 고인을 "중국 공산당의 우수당원,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 걸출한 무산계급 혁명가·정치가,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로 규정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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