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직노동자 박모(56)씨는 장성한 두 아들을 뒀지만, 유독 아홉 살 난 막내 딸을 금지옥엽 아꼈다. 그러나 늦둥이 딸과 오손도손 행복한 가정을 유지했던 것도 잠시. 지난해 10월 아내 강모씨를 폭행하면서 집안에 불행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참다 못한 아내는 결국 딸을 데리고 별거에 들어갔다. 그 무렵 박씨는 아내가 전세로 구했다던 서울 방학동 집을 실은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40만원으로 계약한 사실을 알게 됐다. 부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다 올해 1월 박씨가 전화로 아내에게 “나머지 전세금을 어디에 썼느냐”며 추궁하자 아내는 “정신병원이나 가라. 우리 아기(딸) 볼 생각도 하지 마라”고 쏘아붙였다.
아내의 말에 이성을 잃은 박씨는 그 길로 집 근처 주유소를 찾아가 등유 20여ℓ를 구입했다. 집으로 가져온 등유는 두 아들과 딸의 방 곳곳에 뿌렸다. 박씨가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마자 화염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결국 다세대주택 2층 전체를 다 태웠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약 6,100만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사랑하는 딸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딸 바보’ 아빠는 결국 현주건조물 방화로 기소돼 법정에 섰다.
12일 서울북부지법에 따르면 지난 9일 601호 법정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 박씨 변호인 측은 “피고인이 우울증, 알코올 의존증을 앓고 있어 치료가 필요하다”며 재판부에 집행유예를 호소했다. 검찰의 구형량은 징역 6년이었다.
재판에 참가한 배심원 7명은 박씨의 빗나간 부정(父情)을 가엾게 봤다. 배심원 전원은 박씨가 유죄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양형은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집행유예 3년이 적당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어 서울북부지법 형사13부(부장 이효두)도 배심원 결정을 받아들여 박씨에 대해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인 집주인이 처벌을 원치 않고 피고인이 특별한 전과가 없는 점 등을 참작했다”며 양형 사유를 밝혔다.
장재진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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