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은 인간의 손을 벗어난 재앙이고, 그렇기에 문학이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눈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종말에 비견할만한 극단적 상황은 일상의 역동성 아래 가라앉아 있던 여러 가지 질문을 수면 위로 띄워 올린다. 메르스의 공포가 덮친 오늘날 한국에서처럼.
정유정의 소설 ‘28’은 가상의 위성도시 화양에서 ‘빨간 눈 괴질’이라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퍼지며 벌어지는 아비규환을 다룬다. 정부는 화양시를 봉쇄하고, 살려달라는 시민과 그들을 향해 발포하는 군대. 죽음의 공포 앞에 선 인간의 이기심은 화려한 지옥도 한 편을 그리고도 남는다. 병이 개로부터도 옮겨질 수 있다는 게 밝혀지자 개들은 집단으로 생매장을 당하고, 화양 바깥의 사람들은 화양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극한의 상황이 만들어내는 질문은 지금 우리 사회의 갈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외부와 접촉한 메르스 환자들의 이야기가 보도되면서 그들에게 쏟아지는 질타의 눈빛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이야?’에 대해 작가는 되묻는 듯하다. 사람은 죽으면 안 되고 개는 죽어도 되는가. 너는 죽으면 안 되고 나는 죽어도 되는가.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 주인공도 도대체 누구 잘못이냐고 따져묻는다. 체육교사 캔터는 전염성 강한 소아마비로 아끼던 제자들이 하나 둘 죽어나가자 신을 조롱하고 저주한다. 그러나 도망치듯 다른 도시로 이주한 그는 새로 친해진 학생의 다리가 갑자기 굳는 모습을 목격하고, 결국 자신이 보균자였음을 깨닫는다. 연인과 직장을 모두 잃고 폐인이 된 캔터를 향해 작가는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냉정하게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며, 따라서 그 짐(전염의 책임)을 스스로 어깨에 지려는 것은 오만한 일이라고.
하지만 지금 우리 국민은 무능한 방역으로 메르스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 정부가 그런 오만이라도 떨어주기를 고대한다. 전파력이 강하지 않다며, 걱정할 필요 없다며, 유언비어 처벌에 나선 정부의 방만함에 넌더리가 난 탓이다.
전염병의 창궐은 곧 인간의 완전한 통제력 상실이고, 여기서 결국 인간 자신에 대한 성찰로 향한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흑사병이 창궐한 해변도시 오랑의 몇 달을 그리고 있다. 격리된 오랑의 20만명 주민들은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간다. 어떤 이는 전통적 장례법이 무시당한다며 슬퍼하고 어떤 이는 받아야 할 처벌이 유예됐다며 기뻐한다. 그들 가운데 기계처럼 환자의 물집을 째고 고름 뽑는 일을 반복하는 의사 리유가 있다. 난파 중인 배에서 노를 놓지 않는 리유처럼 오랑의 시민들은 차차 일상을 견디는 법을 배운다. 결국 페스트를 버틴 힘은 정치도 종교도 아닌,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여전히 인간이고자 하는 욕구다. 리유는 말한다. “나는 영웅주의와 성스러움에 취미가 없습니다.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
문학 속 전염병이 유발하는 각종 사회문제들은 그것이 특수한 상황, 백신만 개발되면 종료될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페스트’의 마지막 부분은, 언제고 재현될 수 있는 전염병이란 재난에 대비해 우리가 갖춰야 할 정신적 백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기쁨은 항상 위협을 받으리라는 것을 떠올렸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살아남아 있다가,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 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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