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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의 이가 부러졌다, 말길이 깨졌다

입력
2015.06.1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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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패션 큐레이터 1호 김홍기씨가 매주 금요일 라이프면에 ‘입는다, 고로 존재한다(입고존)’를 연재한다. ‘댄디 오늘을 살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 등의 책을 통해 패션과 인문학을 결합한 왕성한 저술작업을 펼쳐 왔으며, 앞으로 ‘입고존’을 통해 패션의 깊은 의미들을 다채롭게 풀어갈 예정이다.

“YKK가 뭐예요, 선생님?”

청바지 지퍼 상단에 새겨진 YKK라는 영문 이니셜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이들이 자주 있다. YKK는 1934년 일본의 요시다 타다오가 설립한 지퍼제조회사다. 자신의 이름을 딴 요시다 공업주식회사(Yoshida Kogyo Kabushikikaisha)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YKK는 만만한 회사가 아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연간 75억개의 지퍼를 생산한다. 세계 지퍼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YKK는 세계 60여개국에 132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패션 부자재 제국이다.

패션은 인간의 신체와 함께 진화해왔다. 인간이 옷을 입는 과정에서 ‘여밈’이란 행위는 추위로부터 최대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고대의 옷고름에서 중세의 단추로, 또 근대의 지퍼로 넘어오면서 인간을 감싸는 옷의 실루엣에도 변화가 생겼다. 일단 옷을 입는 시간이 단축되었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이 입었던 토가는 하인이 항상 입혀줘야 했고, 완벽한 착장을 위해 평균 2시간 정도를 소비했다. 단추가 발명되면서 인간이 옷을 입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특히 소매부분에 단추를 달아 신체의 선이 매혹적으로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지퍼는 1891년 미국 중서부 지역의 떠돌이 세일즈맨이었던 휫컴 저드슨이 운동화 끈 대신 사용하기 위해 발명했다. 이후 스웨덴 출신의 전기 기술자인 기디언 선드백의 개량을 통해 오늘날의 형태를 띠게 된다. 선드백의 참신한 발명품을 패션산업은 반기지 않았다. 후크나 단추에 비해 가격이 높고 옷의 재단을 바꿔야 했기에 위험천만하고 짜증나는 발명품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퍼는 운이 좋았다. 당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해군들의 담배쌈지와 전대에 이용되면서 돈줄이 되는 틈새시장을 찾은 것이다. 1923년 해군용 장화를 납품하던 세계적인 고무회사 굿리치가 신제품 장화에 지퍼(Zipper)란 이름을 붙이면서 장화 자체보다 더 유명세를 탄다. 지프(zip)란 말은 총알이 날아가거나 천이 찢기는 소리의 의성어로서 왕성한 기운을 의미하는 미국의 구어다. 말 그대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기죽지 말고 열심히 싸우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1930년대에 드디어 지퍼는 여성패션의 품목으로 사용되었다.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이 여성의 늘씬한 몸매를 드러낼 실루엣을 만드는데 효과를 내는 지퍼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밀착의 귀재' 알라이아가 선보인 지퍼 드레스. 10 꼬르소꼬모 제공
'밀착의 귀재' 알라이아가 선보인 지퍼 드레스. 10 꼬르소꼬모 제공

패션품목은 사용빈도가 누적될수록 문화적 지위를 확보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 내부의 미묘한 미감과 감성을 드러내는 문화적 기표가 되는 것이다. 지퍼도 예외가 아니다. 1932년 소설가 앨더스 헉슬리는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과학문명의 과도한 발전의 결과로 인간성이 상실된 미래사회의 면모를 그렸다. 이곳의 인간들은 지퍼가 달린 옷을 입는 것으로, 기계적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1946년 영화 ‘질다(Gilda)’에 출연한 배우 리타 헤이워드는 밤무대에서 노래를 하며 옷을 벗는 무희 역할을 맡았다. “지퍼를 내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부탁과 함께 남자들이 달려든다. 지퍼는 여성의 성적 유혹을 환기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복종과 지배의 아이콘으로도 사용된다. 지퍼는 여밈의 템포를 빛의 속도로 바꿔준 의상 부자재다. 옷에 벗기기 쉬운 속성을 갖도록 해서 남성이 성적으로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퍼의 잠금쇠 돌출부를 살펴보면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것도 한몫을 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청년문화의 발흥과 더불어 지퍼는 성의 해방을 상징하는 사물이 된다. 60년대 할리우드는 청년문화에 눈을 돌리면서 기성세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식을 영화에 담는다. ‘위험한 질주(The Wild One)’(1953년 작)에서 주인공 말론 브란도는 여러 개의 지퍼를 단 오토바이 재킷을 입고 나와 청년의 저항과 구속되지 않은 혁명 정신을 표현했다. 이렇게 지퍼는 열림과 닫힘, 분리와 결합, 성적인 힘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위에서부터 채우는 단추와 달리, 지퍼는 반드시 아래에서 올려서 여민다. YKK 이야기를 다시 꺼낼 차례가 되었다. YKK의 현 CEO는 설립자 요시다 타다오의 아들인 요시다 다다오시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업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종교집단처럼 한 사람을 신격화하고 철저하게 내부자들만 이익을 공유하며 헌신을 강요하는 구조, 무엇보다 의사결정과정에서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경영자가 챙기는 걸 못마땅해 했다. 다다오시는 자신이 경영을 맡으면서 선대의 경영방식을 혁파했다. 60년대에 이미 해외진출을 모색했던 YKK에게 필요한 것은 현지화의 논리, 즉 핵심기술과 시스템을 제외한 모든 것을 현지 구매하고 관리자들에게 열린 소통의 장을 열도록 한 것이었다. 경영자가 챙기기보다, 시스템간의 원활한 이음새 없는 교류가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단추는 한 두 개가 떨어져도 큰 문제가 발생하진 않는다. 반면 지퍼는 이가 한 두 개만 빠져도 전체과정이 어긋난다. 잠금 과정의 효율과 속도를 보장해주는 반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소통의 체계를 기입할 때 완전한 실패로 끝난다는 점을 지퍼는 말해준다.

세상은 점점 투명한 소통을 강조하고 요구한다. 소통은 대상과 대상 간의 열림 상태를 지향하지만, 역설적으로 지퍼는 닫힘으로써 소통을 완성한다. 그 닫힘은 단순한 폐쇄가 아니라 외부에 대해 내부를 보호하고 포옹하는 닫힘이다. 옷과 인간, 두 세계 사이에 벌어진 균열의 틈새를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연결하며 닫는다. 이 원리는 단순히 옷을 구성하는 기술에만 국한되지 않을 듯싶다. 최근 우리사회를 강타한 메르스의 확산일로를 보며 다시 한번 소통의 이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비공개주의로 일관했던 관련부처들은 국민들에게 공포심만을 확산시켰다. 메르스의 확산속도를 따라잡기엔 부처간 소통체계는 마치 이가 빠져버린 지퍼 같았다. 잠금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진 지퍼였다. 이런 지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수리부터 맡겨야 하겠지만, 우선 현장감각 하나 없이, 말로만 상황을 인지하며 대처해온 관련자들의 입에 지퍼부터 채워야겠다.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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