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총 쥐던 손, 꿈 좇아 바늘을 들다
오락기 팔던 문구점 딸, 이젠 남성 못지 않은 게이머
의미없는 선물은 주기 싫어요, 손수 만드니 모두가 감동
예비역보다 빠삭한 지식, 의지는 현역 안 부럽네
국어사전에서 찾은 취미(趣味)는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란 뜻을 갖고 있다. 내가 좋아서, 나 좋자고 하는 취미라는 걸 (머리로는)알면서도, 타인의 그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에 무람없이 남녀를 가르마 태우는 자신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취미는 철저히 ‘남들 모르게’ 즐길 자신 없다면 자기검열을 고민하게 되는 ‘반공반사(半公半私)’의 영역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편견을 넘나들며 취미의 본령을 지키고자 분투하는 20, 30대의 모습은, 뭐랄까, 아름답다.
바느질하는 특전사
김호룡(33)씨는 나고 자란 제주도에서 작은 봉제인형 제작 회사(상상쏘잉)를 운영하고 있다. 회사대표 김씨를 포함한 직원 4명이 주문을 받아 손바느질로 인형을 만든다.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달라”며 손님이 보내온 그림(평면)을 바탕으로 인형의 입체적 형태를 구상하고 바느질과 미싱 작업으로 완성품을 내놓는다. “쉬운 그림이면 하루 만에도 만들지만, 어려운 그림이면 사흘도 넘게 걸려요. 계속 실을 뜯거나 풀어야 할 때도 있고, 와이어 삽입 작업이 뒤따르기도 하니까요.”
김씨가 “인형 만드는 일을 한다”고 하면 그의 우람한 덩치를 보며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아기자기하게 디자인된 회사 홈페이지는 물론, 명함이며 브로셔까지 모두 그의 작품임을 밝히면 의심의 눈길이 더욱 샐쭉해진다. 김씨의 풍모가 지금보다 예전 직업에 딱 어울리니 그럴 수 밖에. 그는 육군 특수전사령부(특전사) 부사관 출신이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유사시 적지 침투’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고된 훈련을 감당했다. 좋은 대학 나와 좋은 기업에 들어가야 하고,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꿈이 아니라 생계를 좇기를 강요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특전사 지원 이유다.
군대가 자신의 꿈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과감하게 인생을 유턴했다. 일본에서 2년 간 머물며 무역회사에서 일한 뒤 호주로 건너가 4년 동안 대학에서 마케팅 및 창업을 전공했다. 호주 영주권 취득을 눈앞에 뒀지만 창업의 꿈을 이루고 싶은 터전은 한국, 그것도 고향 제주도였다. 군대 후배와 함께 1년 가까운 준비를 거쳐 지난해 10월 지금의 회사를 차렸다. 그 동안 인형 100여종을 만들며 직원을 늘렸고 정부 지원도 받았다. 최근엔 유명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의 소품용 캐릭터 인형을 주문 받아 납품하기도 했다.
‘남성 조직’의 정점이라 할 만한 특전사 소속 군인이 10년도 안돼 가느다란 바늘 하나 들고 때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오밀조밀한 인형을 만들고 있는 가파른 ‘인생유전’이 그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한다. “여자는 결혼하면 요리하고 빨래해야 한다는 식의 문화가 싫어서 외국에 나가서 오래 살았던 것도 있어요.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남자도 다 할 수 있고 뒤집어 봐도 마찬가지죠.” 예전에도 지갑이며 퀼트며 만들며 자신의 손재주를 확인해봤고 동업자(군대 후배)도 기술이 좋으니, 남들이 취업 전쟁을 벌이는 30대 어귀에 딱 맞춤한 회사를 차린 셈이다. “호주에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너는 일반회사 들어가면 반드시 싸우고 나올 거다’라고 말했어요. 저 또한 틀에 박힌 걸 싫어한다는 걸 인정하게 됐죠. 사업을 시작하게 됐으니 남녀에 대한 편견이나 수직적 구조 같은 건 없는 일터를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게임하는 여자
조행선(26)씨가 자라오면서 수백 종의 게임을 섭렵할 수 있었던 건 문구점에서 게임기를 팔던 부모님 덕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게임을 접했던 그녀는 CD나 콘솔 게임부터 메이플스토리, 스타크래프트, 서든어택, 월드오브워크래프트까지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다.
조씨가 생각하는 게임의 가장 큰 매력은 현실감. “스킬(기술)이나 이펙트(효과)가 화려한 게임을 좋아해요.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바로 반응이 나오는 게 재미 있어요. 진짜로 뭘 하고 있다는 느낌에 몰입하게 되고 쾌감이 들어요.”
이런 조씨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여고, 여대를 다니다 보니 같이 취미 생활을 즐길 친구가 없었던 것. ‘게임 하는 여자’를 낯설게 보는 시선에 그녀는 적잖이 당황했다. 주위에서 쏟아지는 “넌 왜 취업 준비 안 해?” “나이 먹고 무슨 게임을 해?” 등의 질문들도 조씨가 게임한다는 것을 숨기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즐거움이 사라진 대학 생활엔 회의감만 밀려들었다.
2012년 직접 교내 게임 동아리를 만든 것은 이런 억눌림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나처럼 외롭게 게임 하는 사람들을 모아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한 동아리에서 그녀는 서서히 치유됐다. 더 이상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과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 다른 것뿐’이라 여기며 당당히 취미를 밝힌다.
게임판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유저인 조씨이지만 게임에 대한 열의만큼은 웬만한 남성 못지 않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종일 플레이 하는 날이 부지기수다. 게임에 투자하는 돈도 월 50만원을 넘는다. 심할 땐 100만원 가까이도 쓴 적이 있다. “보통 여자들은 쇼핑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는데, 저는 대신 게임에 돈을 투자해요. 남들이 보기엔 충동적일 수 있지만 저로선 그만큼 돈을 주고 게임 ‘서비스’를 이용하는 거죠.”
게임을 할 때 남성 유저들이 여성을 대하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무시하거나, 아니면 추근대거나. 조씨도 이런 반응에 익숙하다. 친해졌다고 생각한 사람들로부터 ‘여자니까 봐주자’ 또는 ‘여자라서 역시 못 하네’ 같은 말을 듣고 상처받은 적이 많다. 사는 곳을 물어보거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불편한 시선을 받는 게 싫어요. 저도 게임을 즐기는 한 명의 유저일 뿐이거든요.”
조씨는 “남자애가 고무줄이나 공기놀이를 좋아하면 손가락질 받는 식으로, 본인 취향과 무관하게 젠더(사회적 성별)가 주입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며 “그런 식으로 성 역할을 갈라놓고 취미까지 관여하는 건 정말 안될 일”이라고 성토했다. “취미는 내가 좋아해서 하는 거잖아요. 내가 즐기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팔찌 만드는 남자
대학생 박병준(26)씨는 2년 전부터 ‘원석 팔찌’ 만드는 취미를 들였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들인 천연석 알갱이들을 우레탄 재질의 가는 줄에 꿰어 주변에 선물하곤 한다.
우연히 신촌에서 천연석 액세서리를 파는 일본계 매장에 들른 것이 계기였다. 브이넥 셔츠로 목이 훤히 드러나는 여름이면 목걸이를 즐겨 찰 만큼 평소 장식품에 관심이 많았지만, 천연석 액세서리는 재료마다 ‘신비로운 효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예컨대 오팔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끌어내주고, 카네리안은 성공으로 이끌어준다. “미신 같긴 하지만, 저한텐 무척 흥미롭더라고요.”
문제는 가격. 맘에 드는 원석들로 만들어진 팔찌 하나가 5만원이나 했다. 준보석이라도 포함될라치면 값이 7만~8만원에 이르렀다. ‘원석을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가구도 손수 만들고 ‘바리깡’으로 제 머리를 깎을 만큼 손재주에 자신 있는 만큼 재료만 구한다면 액세서리 만드는 건 일도 아닐 듯싶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맞춤한 쇼핑몰을 찾아 점 찍어둔 천연석들을 사들였다. 물론 보석이나 준보석 같은 고가 재료는 제외했다. 박씨가 요즘 차고 다니는, 그 일본계 매장이었다면 5만원은 족히 줬을 팔찌의 원가는 단돈 1만원. 박씨의 어머니와 여자친구, 대학 토론동아리 친구들도 그가 만든 팔찌를 하나 둘 씩 갖고 있다. “동아리 친구는 모두 남자애들인데 받고는 다들 좋아하더라고요.”
‘메이드 바이 병준’ 원석 팔찌는 특별한 선물이다. ‘재료’가 특이해서가 아니라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팔찌 하나엔 탄생석을 포함해 네 종류의 천연석이 들어간다. 각각의 돌이 품고 있는 ‘효능’은 박씨가 선물 받는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와 다름 없다. 9월생 친구에게 준, 청금석(9월 탄생석)에 오닉스, 적철광, 아라고나이트가 맞물린 팔찌는 스트레스를 치유하고(아라고나이트) 힘을 북돋워(적철광) 잠재능력을 깨우길(오닉스) 바란다는 뜻이 담겼다. 여자친구 선물엔 ‘연인의 부적’이라는 문스톤이 포함됐다. 박씨는 인터뷰 내내 ‘의미’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제가 토론동아리 창립 멤버예요. 아무 의미 없이 시시껄렁한 잡담만 이어지는 대화가 싫었거든요.” 그가 너무 진지한 건가? 글쎄.
박씨는 “성별 때문에 내 취미나 행동이 제약받는 걸 인정할 수 없다”는 팔찌 만드는 취미의 ‘성별’을 따지길 거부했다. “남자끼리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이상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아직도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나, 재밌네…’ 싶어요.” 그는 남자들도 여자들처럼 서로 연애든 뭐든 터놓고 얘기하자고 제안한다. “남자들끼린 ‘데이트 했냐’ 이러고 끝이거든요. 괜히 연애를 못하는 게 아니예요. 여자들처럼 활발히 정보 공유를 해야 도태되지 않죠.”
군대가 좋은 여자
공대생 이가연(22)씨는 소위가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원사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소위는 갓 복무를 시작한 장교의 계급인 반면, 원사는 오랜 군 생활을 거쳐 오르는 부사관의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보병, 포병, 공병 등으로 나뉘는 병과 체계에도 빠삭하다. “제가 군대에 대해 알고 있는 걸 얘기하면 남자들이 더 놀라요. ‘나도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이런 반응이죠. 혹시 예비군이냐는 질문도 종종 받습니다.”
이씨는 군대를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처럼 ‘밀리터리 룩’을 선호한다는 게 아니다. 옷 입는 취향은 오히려 여성스러운 편. 다만 군대 문화나 조직체계 등 군대 자체에 관심이 많다. 여자들 사이에선 흔치 않은 ‘취향’이라는 점을 이씨 또한 인정한다. “그렇죠. 군인이라고 하면 특수하게 보거나 심지어 싫어하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게 없어요.”
이씨가 군대에 친숙한 이유 중 하나는 친구 아버지 중 군인이 많아서였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한때 사관학교 입시를 준비하며 “군대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일반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나이 제한이 있는 사관학교 대신 3사관학교 입교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를 겪었다. 그런 과정에서 군에 대한 그녀의 지식과 이해의 폭도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장교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희망은 ‘통제된 생활’에 대한 희구에서 비롯했다. 훈련 기간부터 초임 시절까지, 별다른 휴가나 외출도 없이 사회와 떨어져 생활해야 하는 시간이 자신에게 필요하다 싶었다. “요즘처럼 유혹도 많고 잘못된 길로 가기 쉬운 세상에서 절제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20대 초반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젊을 때 습관을 잘 들여놓는다는 차원에서.”
직업 군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현실에 부딪치며(“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고, 부모님도 반대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조금씩 약해지고 있지만, 이씨의 ‘생활 군기’만큼은 현역 군인이 부럽지 않다. “제가 정한 기준은 지키는 편이예요. 잠은 무조건 집에 들어가서 잔다거나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겠다거나 하는. 매년 그 해 실천할 목표도 세우고요.” 올해는 용돈을 아껴 자신이 태어난 병원의 신생아 중환자실에 매달 후원금을 내고 있다. 조산아로 태어나 아플 일 많았던 어릴 적 경험 때문이다. 내년쯤엔 1년 동안 머리를 길러 소아암 환자들에게 가발을 선물할 계획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ankookilbo.com
김정화 인턴기자(이화여대 중어중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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