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니 초등학교 1학년 딸이 학교에서 배웠다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제목은 ‘통일도전 O, X 퀴즈.’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수업 시간에 풀었던 문제라고 했다.
문제 수준이 만만치 않았다. 몇 개만 예로 들면 이렇다. ‘북한 어린이들도 점심시간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다’, ‘북한에서 연예인은 청소년들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엄격한 북한 사회에서는 아무리 연예인을 좋아해도 팬레터를 보낼 수 없다.’ 답은 모두 X였다. 힌트를 보니 북한 어린이들은 점심시간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다시 등교해 방과후활동을 한단다. 또 북한 최고 미인이라는 배우 오미란이 팬레터의 북한식 표현인 ‘성과편지’를 가장 많이 받는다고 돼 있었다.
북한 아이들은 헐벗은 채 굶주리고 있고, 붉은 돼지와 늑대 병사들에게 학대 당한다고 해댔던 1970, 80년대 반공교육과는 차원이 달랐다. 딸 아이는 “통일이 되려면 남북이 사이 좋게,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셨어”라는 근사한 말까지 남겼다.
통일대박.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신년기자회견에서 화두로 던진 후 정부 외교안보정책의 핵심목표가 된 구호다. 정부는 통일준비위원회를 만들었고, 통일박람회니 통일준비사업이니 통일교육에 힘 쏟고 있다. 어릴 때부터 반북(反北)교육이 아닌 통일교육을 시키는 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첫 마음, 첫 배움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정부와 대통령이 말하는 통일대박론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만큼 정부와 대통령은 진심으로 북한을 알려고 하고, 통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까.
최근 상황을 보면 답은 X다.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이후 장성택 숙청,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이해 안 되는 북한식 통치와 도발 사례는 수두룩하다. 그러나 말썽 많은 동생 꼴 보기 싫다고 자꾸 못된 짓만 들춰내는 우리 정부 행태도 이해가 안 된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처형설 정보를 국가정보원이 느닷없이 공개하는 과정이나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방한 이후 갑자기 북한 정세 유동성이나 대북 압박 얘기가 나온 게 그렇다.
여러 북한 전문가들이 지적해왔듯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게 특징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니, 통일대박이니 말은 그럴 듯 하지만 행동과 따로 놀기 일쑤다. 북한이 대화를 제의하면 격을 따지다 기회를 놓치고, 우리가 먼저 대화를 제의해놓고 분위기는 반대로 엄하게 가는 식이다. 단계적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기보다 한 방에 뭔가를 이루려 하고, 목표는 세웠지만 방법론과 수단은 보이지 않다 보니 자꾸 흡수통일 의심만 남기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 것”이라던 대통령 말처럼, 통일이 그냥 간절히 원한다고 이뤄지는 것인가. 노력도, 단계도 없이 저절로 모든 난제가 풀려갈 것이라 보는가. 하긴 최근 메르스 대응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지만, 솔직히 남은 2년 반 정부와 대통령이 없던 능력 갑자기 발휘할 것이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시 6월이다. 15년 전 이 맘 때 남북은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평화와 화해 기대로 부풀었다. 6ㆍ15 공동선언에선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공통성을 인정하는 식으로 통일논의의 단초도 마련됐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평화가 자리잡지 못해 연평해전으로 우리 해군 6명이 스러진 것도 2002년 6월이었다.
한반도에 왜 평화가 필요한지, 왜 통일 논의를 해야 하는지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6월. 초등학교 1학년들도 아는 남북관계의 ‘사이 좋게, 친하게’ 원칙을 실현해야 할 골든타임이 위정자들의 무책임한 언동과 무능 때문에 아깝게 허비되고 있다.
정치부 정상원기자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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