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동 수해사건ㆍ부천 성고문사건 변론 맡은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서울지방변호사회, 기념사업 진행 "인권보장ㆍ정의실현 사명 되찾겠다"
변호사 2만명 시대를 맞았지만 이들을 대하는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고위 판사ㆍ검사 출신 변호사들이 대형 로펌에서 고액 수임료를 올리는 전관예우가 여전하고, 기획소송 등 ‘돈’되는 사건 수임에만 열을 올리는 변호사들도 그대로다. 사법연수원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 간 갈등도 그들만의 이익다툼으로 비친다. 법조인이 가세한 위법ㆍ탈법 사건은 갈수록 늘고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진행 중인 ‘시대를 밝힌 자랑스러운 변호사 조영래 기념사업’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올해 25주기를 맞은 고 조영래 변호사는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법조인들은 물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김한규(45ㆍ사법연수원 36기) 서울지방변호사회장은 5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조 변호사의 인생을 통해 ‘인권보장’ ‘정의실현’이란 변호사 본연의 사명을 되찾고자 한다”며 “국민신뢰를 차근차근 회복해 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대법관 출신의 전관예우 문제 등 변호사들이 앞장 서 ‘공정사회’를 헤치고 있단 비판이 많다”며 “변호사로서 ‘잘 나간다’는 의미가 높은 수임료 받는 것이 아닌 변호사로서의 사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변호사법 1조는 변호사의 사명으로 ‘정의실현’ ‘인권보장’을 못 박고 있다. 김 회장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도 변호사 사명대로 소외된 이들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변호사들이 여전히 많다”며 “이들을 재야에서 끌어올려 변호사 사회 전체에 경종 울리는 일이 우리 단체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 점에서 조영래 변호사는 변호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명을 몸소 실천한 본보기”라고 말했다.
조영래 변호사는 1965년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법대에 입학해 김근태, 손학규 등 학우들과 함께 한일회담 반대, 3선 개헌 반대 등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사법연수원 시절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1년6월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1973년 4월 만기 출소했지만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돼 6년 간 도피생활을 했다. 변호사 일을 시작한 건 1983년부터. 이듬해 망원동 수해사건 집단소송, 1986년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사건, 1987년 상봉동 진폐증 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을 변론했다. ‘전태일’ 이름 석자를 널리 알린 ‘전태일 평전’의 저자기도 하다.
서울변호사회는 조 변호사를 기리는 사업을 크게 두 가지로 진행 중이다. 조 변호사 흉상 제작과 매년 ‘조영래상’을 시상하는 일이다. 조 변호사 흉상은 후배 변호사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입구에 세울 계획이다. 김 회장은 “대법관 출신이건 로스쿨 출신이건 서울의 모든 변호사들은 변호사 등록을 위해 변호사회관에 와야 한다”며 “그들이 회관을 드나들며 조 변호사 흉상을 보고 변호사 사명을 되새기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매년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에 크게 기여한 서울변회 소속 변호사에게 조 변호사의 이름을 딴 상을 주고 격려와 축하를 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사업 첫 해인 올해는 12월 11일 변호사회관 1층에서 유족들을 초청해 뜻 깊은 행사를 연다. 앞서 11월 30일부터 조 변호사의 사진과 자필 문서 등을 전시하고, 조 변호사 유족과 지인들의 인터뷰 녹취록, 후배 변호사들의 추모글, 상세연보와 지금까지 발표되지 않는 미공개 자료 등을 수록한 기념책자도 제작해 배포한다. 김 회장은 “기념사업이 변호사에 대한 국민 신뢰를 높이고 법조인 화합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관진기자 spiri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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