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날린 결정타 "야, 이거 완전 촌놈 다 됐네"
촌스럽게 사는 게 자유롭게 사는 것… 기댈 아내까지 있어 행복한 촌 생활
밤꽃 냄새가 비릿하게 오토바이를 따라왔다. 농장에서 논으로 가는 내리막 길, 봄 처녀 치맛자락 같던 아카시아 향은 어느새 음흉한 사내의 바지춤 체취로 본색을 바꿨다. 꽃 냄새에 얼굴 찡그리자니 내 몸 땀냄새도 나을 건 없을 것 같다. 그나마 살 붙어 숨죽이던 지하철 안 타도 되는 게 다행이다.
한편엔 아직도 밀이 누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곳곳에 물 가득한 논에는 트랙터가 써래질하며 화살표 물살을 만들었다. 모판을 날라 대느라 트럭들은 먼지를 일으켰고 모내기를 끝낸 논에서는 빈 자리 땜빵한다고 노인네들이 느리게 움직였다. 언뜻 보면 ‘그림’이다. 하긴, 나도 어릴 적 이발소에서 본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평화로운 풍경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림 한편에 말 탄 지주가 지켜보는 것도 몰랐고, 저 할매들 허리가 끊어지게 아플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으니까.
이제 6월초, 아직 이렇게 뜨겁지 않아도 되는데 하늘은 쳐다보기 두려울 정도로 눈부셨다. 좀 서둘렀으면 이렇게 찌는 날 고생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게 잘 안 된다. 이름값 좀 하는 누구는 나같이 뭉그적대는 사람들에 대해 “미래에 대한 간절함보다 현재 자신의 욕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꾸물거리기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했다. 침을 맞고도 별로 아프지 않은 걸 보니 어차피 그런 말은 나 같은 부류에게 소용이 없는 말인가 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만 만족하면 그만이다.
논에 도착하니 받아 놓은 물에 잠긴 태양까지 번쩍이며 아래 위로 자외선을 쏘아댄다. 그렇잖아도 모자 챙 넓이를 벗어난 얼굴은 이미 벌개져있는데 피부관리엔 젬병인 날이다. 지금 상태도 썩 좋지 않은데 이러다 피부가 아니라 그냥 껍데기가 될까 봐 겁난다. 가끔 아내가 꼬집어도 별로 아프지 않은걸 보면 이미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촌스러운 모양새로 안정돼가는 느낌이 불길하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노랗게 바랜 주황색 물 장화를 당겨 신는데 이상하게 생긴 경차가 지나갔다. 유심히 보니 광고 박스를 지붕에 실었다. “물 좋으다 OO나이트!” 옆 도시인 순천 업소에서 광고하러 돌아다니나 보다. 정신 없는 사람이다. 이 바쁜 철에 논 주변으로 저런 광고를 하고 다니면 소용 있겠나. 가뜩이나 논에 물 받느라고 신경 곤두서 있는데 나이트클럽 수질 얘기가 눈에 들어오겠냐 말이다.
논 흙을 고르게 펴는 써래질을 하려면 땅이 안보일정도로 물을 대야 하는데 엊그제부터 받은 물이 아직도 성에 차지 않았다. 3000제곱미터(900평) 논배미에 물 10센티미터를 높이려면 300톤이 필요하다. 도시에 자주 돌아다니는 5톤 살수차로 60대 분량이다. 지리산 덕에 크게 가물진 않았다 해도 논마다 적잖은 양의 물이 필요하다 보니 이맘때는 날카로워지기 마련이다. ‘물싸움에는 부자지간도 없다’고 하지 않은가. 실제로 3년 전 가뭄 때, 새벽 2시에 나가서 수로 위쪽에 막아 놓은 물을 터보려고 했더니 3명이나 지키고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살벌한 표정이 번쩍거려 말도 못 붙이고 돌아와야 했다.
땅강아지가 뚫어 놓은 구멍도 막을 겸, 물 새지 않도록 논두렁 주변을 꾹꾹 밟다 보니 첫 모내기 때 생각이 났다. 마을에서 유일한 동갑내기인 친구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논 고르는 방법, 모내기 할 때 모판 준비하는 요령, 적당한 물 높이 등을 알려줬다. 그 친구는 이곳이 고향이지만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내려온 지 5년쯤 되는 해였다. 저도 내려온 지 얼마 안 되는 처지에 내가 서툰 몸짓을 하면 “아무리 몰라도 그것도 모르냐”며 꽤나 구박했었다. 모르면 그냥 모르는 거지, 아무리 모르는 게 있고 대강 모르는 게 있을까. 누군가 귀농해서 나한테 물어보면 참 친절하게 알려줄 수 있는데, 논 농사짓겠다는 후임이 없다.
큰 논 손질을 마치고 작은 논에서 일하는데 아랫도리가 저려왔다. 덥다고 마셔댄 물이 땀으로 쏟아내고도 남은 게 있었나 보다. 적당한 자리를 찾는데 오늘따라 주변에 사람이 많다. 전봇대로는 가리기가 힘들겠고 자리를 옮기자니 잘 못 걷겠고, 즉석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난감했다. 우리 논 방향으로는 사람이 없었지만 논두렁은 나지막했고 저만치 큰 길에 차가 지나다녔다. ‘앉아 쏴’할 수도 없고 해서 도로까지 거리를 계산하니 어림잡아 200미터. ‘그래, 뭐 이정도 거리면 뭐 보이겠나’ 싶어 급하게 쏟아냈다. 부르르 떨면서도 ‘내가 콤플렉스 있나?’ 싶었는데 지나가던 차가 “빠아앙”하며 길게 경적을 울렸다. 깜짝 놀라 후딱 마무리하면서 다행히 콤플렉스에 대한 우려도 말끔해졌다. 그렇게 논 일을 마칠 때쯤 전화가 왔다. 읍에서 건강원을 운영하는 친구다. 가끔 전화해서 “살아보니 행복하냐”고 묻기도 한다. “막걸리 두어 통 사서 농장으로 갈게!”
농막에 도착해 슬리퍼로 갈아 신고 옷 좀 털어내고 있는데 그 친구가 들어왔다. “야이 촌놈아! 이거 완전 촌놈 다됐네.” 빙그레 웃었더니 한 술 더 뜬다. “내가 유헌이 널 보면 참 좋아. 얼굴에 자신이 생겨.” 기가 막힐 일이다. 딱 보면 우사인 볼트랑 이복형제가 분명한 놈이 날 보고 위안을 받는단다. 얼마 전 허리 수술하신 우리 엄마가 아시면 공중제비 넘을 일이다. “언제 한 번 봐라. 내가 읍에다 우리 둘 사진 붙여 놓고 스티커 붙이기 한 번 할 테니까. 지는 놈이 크게 한턱 쏘는 걸루. 콜?” 하는데 장씨아저씨가 들어오셨다. “아저씨, 얘가 지 인물이 저보다 낫다는데요?” 자신 있게 여쭤봤지만 아저씨 대답은 짧았다. “그거나 그거나.” 도찐 개찐이란 얘기다. 친구가 다시 대들었다. “어르신, 저는 구례를 떠난 적이 없고, 이 친구는 내려온 지 5년도 안됐는데도 딱 보세요. 누굴 촌놈으로 보겠는가. 유헌이 자넨 귀농 정착에 외모가 도움이 된 유일한 사람이여.”
5년 전 여름, 집도 못 구하고 돌아다닐 때, 섬진강에 띄운 이 친구 배에서 삼겹살이랑 소주만 얻어먹지 않았어도 봐주지 않으려고 했다. 농장 자리 구하고, 농막 수리할 때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살갑게 도와주지만 않았어도 친구 안 하려고 했다. 그 때 아저씨가 한마디 하셨다. “촌스러운 게 나쁜가?”
아저씨 말씀인 즉, 촌스러움은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비싼 거 좋은 거 먹고 입지 않아도 되고, 남들 의식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살 수 있는 생활방식이다. 괜히 위에 사는 사람들 바라보면서 목 부러지지 말고 지 처지 깨닫고 살면 되는 거라 하신다. 앞만 보고 살다가는 인생에서 남는 장사 못한다고. 목소리 높이던 두 촌놈은 한 마디 못하고 듣기만 했다.
한 10여 년 전, 한옥 짓는 목수가 되겠다고 공부를 한 적이 있다. 당시 배운 집의 구조와 명칭, 방법 등은 이제 가물가물 하지만 아직도 명확히 기억하는 게 한 가지 있다. 팔순을 앞두고 있던 한옥사진작가께서 하시던 말씀이다. “모든 사진은 눈 높이에서 사람의 시각과 비슷한 표준렌즈로 찍는 게 중요해요. 뒷산에 올라가 한옥을 찍거나 바닥에서 크게 왜곡해서 찍어놓고 멋있다고 얘기하면 소용 없는 사진이에요. 뒷산에 올라가서 지붕 내려다 보고 살 건가? 아니면 붕어 눈깔 끼고 누워서 살 건가? 세상살이도 마찬가집니다.” 현실보다 억지로 멋있게 보이려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멋진 풍경사진을 보면서 ‘저기 서 있는 저 사람은 참 행복하겠다’ 하지만 그 사진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비춰지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나도 가끔 오래된 사진첩을 넘겨보며 ‘그 때 참 좋았는데’ 하지만 당시엔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사진 들여다보듯 지금 내 모양을 살피면 되는데 말이다. 장씨아저씨가 한 마디 더 하셨다. “촌놈? 지가 촌놈인지만 알면 무서울 게 없는 것이네.”
죽어라 일하지만 욕심의 속도는 그것보다 항상 빠르다고 했다. 욕심의 속도만 늦추면 죽어라 일 안 해도 될지 모른다는 말로 들린다. 일례로, 한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동남아 노동자가 획기적으로 생산비를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단다. 회사에서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겠다고 했더니, 월급은 그냥 그대로 받고 일을 절반만 하면 안되겠냐고 했단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국민답다. 나라면 어느 쪽을 택했을까. 동남아쪽 성향이 짙은 것 같기도 하고...
농막을 나서는 아저씨를 배웅하면서 “꼭 죽어라 일해야 되는 건 아닌가 봐요. 그쵸?” 했더니 전날 옮겨 심은 고구마 순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저 고구마 다 죽겄다. 어여 물 한 바가지라도 더 찌끄러 줘. 지만 살고 저것 덜 죽이면 쓰겄냐!” 즉시 호스로 물을 갖다 댔다.
친구도 돌아간 뒤 누룽지로 점심 때우고 나니 잠이 몰려왔다. 일하는 건 아직 멀었는데 쉬는 리듬은 농사꾼 다 된 것 같다. 메르스는 어떻게 됐나 하고 라디오를 켜니 걱정만 더 해진다. 아나운서는 뉴스가 끝날 때쯤 다른 소식도 전했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 중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72퍼센트로 회원국 중 꼴찌...”라는 내용이었다. 어째서 OECD가 조사만 했다 하면 1등 아니면 꼴찌인지. 한국은 모 아니면 도를 좋아하나 보다. 화끈하다. 72퍼센트라니까 많은 것 같았는데 반대로 기댈 곳 없는 사람이 28퍼센트라니 안타깝다. 보고서 제목이 ‘2015 더 나은 삶 지수’라니 더 슬퍼진다. 악착같이 벌어서 별로 안 친한 사람의 경조사까지 그렇게 잘 챙기는 사람들인데. 억울하기도 하다.
저녁에 집에 들어와 씻고 먹고 누워서 TV를 켰다. 뉴스마다 똑 같은 소리라 채널을 돌리다 보니 하루 세끼 챙겨 먹는 걸 중계하는 프로그램이 나왔다. 가만 보니 돈 벌 일은 안하고 하루 세 번 먹고 치우는 게 거의 다 인데 그것도 힘들어 했다. 저 사람들은 그것만도 힘들어해야 돈을 버는 사람들인가 보다. 옆에 있던 아내가 물었다. “더워서 힘들지 않아? 작물 종류를 더 줄여보면 안될까?” 아내는 요즘 부실한 몸 고쳐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애쓰는 중이다. 말만으로도 힘이 된다. “괜찮어. 작년 보다는 훨 나은 것 같어.”
그래. 사실 좀 나아졌지만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덜한 것 뿐이다. 지리산 다닐 때도 갈 적마다 조금씩 수월해 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나. 이제 5년 차, 지 꼴 아는 촌놈 한 번 해 보지 뭐. 외모까지 받쳐준다는데. 그러다 정 어렵고 힘들어지면 훅 기댈테니, 마누라야! 부디 건강해 다오.
前 한국일보 기자 can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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