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 23일 미국 보스턴 질레트 스타디움. 사상 첫 여자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대한민국 여자 축구대표팀은 북유럽 강호 노르웨이와 힘겨운 마지막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먹고, 먹고, 또 먹고…. 후반 초반까지 정신 없이 허용한 골이 5골. 브라질과의 1차전 0-3, 프랑스와의 2차전 0-1 패배를 기록했던 태극낭자들에게 월드컵 첫 승의 꿈은 일찌감치 달아났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들었지만,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픈 마음에 끝까지 뛰었다. 그리고 그 집념은 후반 30분 값진 결실로 돌아왔다.
상대 골키퍼를 압박해 실축을 유도한 뒤 골 라인으로 흐르는 공을 끝까지 쫓아가 각도 없는 지역에서 차 넣었다. 한국 여자월드컵 사상 유일한 골의 주인공 김진희(34)의 작품이었다.
● 정신력으로 넣은 역사적인 첫 골
김 씨는 3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평소 같았으면 슈팅조차 시도하지 않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 기회를 놓치면 기회가 다시는 올 것 같지 않았다”며 그 때를 떠올렸다.
지금은 대한축구협회 경기감독관으로 활동 중인 김 씨가 떠올린 12년 전의 한국 여자 축구계는 그야말로 불모지였다. 리그도 없었고, 팀도 몇 개 안됐다. 잔디구장 훈련은 언감생심. 그나마 경기를 해도 관중은 선수 가족과 관계자들을 포함해도 100명을 넘기기 힘들었다.
어쩌면 첫 월드컵 본선무대에서 기록한 3전 전패·1득점 11실점이란 기록은 당연했다. 국제 대회라고 해봐야 아시아권을 벗어나지 못했고, 상대팀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아시아 밖 팀들과 맞붙는 경기는 사실상 ‘맨 땅에 헤딩’이나 마찬가지였다.
“월드컵 본선을 겪어보니 체격과 체력, 기술, 경험 면에서 우리보다 뒤처지는 팀은 없었다”고 말한 김 씨는 “모든 게 부족했지만 투지 하나만큼은 보여주고 싶었다”며 “그 정신력으로 넣은 골이 노르웨이전의 골”이라고 했다.
● “금세 잊혀진 골… 솔직히 서러웠다”
12년 전 태극낭자들의 투혼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세월 탓만 할 순 없었다. 반짝했던 관심조차 금세 사라졌던 당시의 아쉬움은 지금까지도 김 씨의 가슴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노르웨이전이 끝난 뒤 곧바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기자회견도 못 했지만 이후 전화 인터뷰도 하고,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했죠. 그 때만 해도 ‘이제 여자축구에도 볕이 뜨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월드컵 이후 별다른 국제 대회도 없었던 데다 부상으로 한동안 경기에 나서질 못하니 김진희라는 이름 석자는 금방 잊혀졌다. 김진희는 “솔직히 너무 서러웠다”고 털어놨다. 현역에서 은퇴하던 2010년에도 그녀의 기사는 없었다.
2003년 여자월드컵 무대를 함께 누볐던 다른 선수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당시 활약했던 선수의 상당수는 은퇴 후 축구와 관계 없는 길을 걷고 있다. 김 씨는 “학교 축구부 코치 정도가 가장 잘 풀린 편”이라며 “결혼 후 축구를 잊지 못해 ‘아줌마 축구단’에 들어간 월드컵 대표도 있다”고 했다. 그는 “예우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대한축구협회나 여자축구연맹에서 선수들의 은퇴 후 진로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었던 점은 아쉬웠다”고 말했다.
● “후배들 4강도 가능… 난 잊혀져도 좋다”
하지만 2003 미국 대회 멤버 중 이번 캐나다 여자월드컵 명단에 이름을 올린 김정미(31·현대제철)와 박은선(29·로시얀카)의 모습에 또 한 번 가슴이 끓어오른다. 김 씨는 “그 때 막내였던 김정미와 박은선이 고참이 돼 후배들을 이끄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23세였던 미국 대회 때는 언니들의 마음을 몰랐지만 은퇴할 즈음엔 고참의 무게감이 엄청났다”고 말한 그는 “(김)정미나 (박)은선이 모두 밝은 모습을 보이지만 그 부담감이 엄청날 것”이라며 “마지막 월드컵이라 생각하고 후회 없는 대회를 펼쳤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
이번 대회 한국의 예상 성적을 묻자 자신 있게 “4강”이라고 답했다. 지난달 31일(한국시간) 미국 뉴저지에서 열린 미국과의 평가전을 보고 8강 이상의 성적은 가능할 거라고 확신했단다. 특히 기본기와 경험을 두루 갖춘 지소연(24·첼시레이디스)의 활약에 기대를 걸었다.
진심 어린 격려도 잊지 않았다. 김 씨는 “이번 월드컵에서 좋은 결과로 후배들 개개인 물론 한국 여자축구가 더 많은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면서 “그게 된다면 내 자신의 기록 정도는 잊혀져도 아쉬움이 없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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