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첫 키스나, 첫 데이트, 첫날 밤, 첫 성적표 등과 같이 초조하고 기대되고, 극도로 흥분되고 두렵기도 한 ‘처음’이 있다. 또 아침에 일어나서 이를 닦거나, 잠시 짬을 내서 커피를 마시거나, 추운 겨울아침 자동차 시동을 어렵사리 켜는 것처럼 일상의 사소한 일들도 ‘처음’ 시작한 날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모든 ‘처음’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기억과 의미로 남아있지 않을까. 나에게 그 많은 ‘처음’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처음’을 꼽으라면 역시 ‘요리’라는 카테고리 중에서 찾기가 쉽겠다.
20여년 경력의 요리사지만 처음 파스타를 한 날, 스테이크를 굽던 날, 오리를 해체하던 날, 빵을 구웠던 날 전부가 솔직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요리사에게 ‘처음’이란 그저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굽고 지지고 볶고 튀기고 삶는 행위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첫 요리’가 진정한 처음이 아닐까 싶다. 콤콤한 향의 블루 치즈를 처음으로 먹었던 날이 나에게 블루 치즈의 ‘첫 기억’이지는 않다.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옛 여자 친구에게 블루 치즈 요리를 해줬지만 입도 대지도 않았던 그 날이 나에게 블루 치즈에 대한 첫 기억인 것처럼 말이다.
내 기억 속 첫 요리는 한국에서의 초등학생 시절 만든 아이스크림이었다. 어머니가 사주신 한 과학책에 적혀있던 레시피였는데, 사실 달걀 노른자와 초콜릿 우유를 통한 일종의 ‘실험’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맛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걸로 봐서 별 맛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인생 첫 요리가 라면이 아니라니 대견하지 아니한가.
캐나다에서 ‘처음’ 직업으로 선택한 요리사의 길에서 ‘처음’ 손님에게 돈을 받고 판 요리는, 그 당시 Chef와 모든 주방 동료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장이 갑자기 지인들이 왔다며 주문해서 만든 ‘호두, 버터와 세이지로 만든 소스의 또틸리니’였다. 요리법이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그러나 달콤짭짤한 치즈가 가득 들어 있던 이태리식 만두 Tortellini가 기억에 남는 이유 역시 사장의 지인들이 잘 먹었다면서 남겨준 적지 않은 금액의 팁 때문도, 그날 일이 끝난 후 사장이 직접 불러내 쏟아내듯이 해주던 칭찬 때문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지시와 도움 없이 오롯이 내가 만들어낸 음식이 모두 깨끗이 비워져 들어 왔다는 안도감과 그때부터 가지게 된 요리사으로서의 자신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그리고 4년 후에 난 그 가게에서 Chef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인생을 바꿀 만큼 나에게 진정으로 기억에 남는 ‘첫 요리’는 뭘까 생각해 봤다. 물론 요리 하는걸 반기셨던 어머니께 처음으로 해드렸던 La Sole Meuniere(프랑스식 넙치 버터구이)와 요리를 하는걸 그리 마뜩잖게 생각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고자 처음으로 해드렸던 Ragu Alla Bolognege(볼로냐식 고기 소스 파스타), 방송 첫 요리프로그램에서 만들었던 Swedish Meatball Pasta와 Sandwich(스웨덴 식 미트볼 파스타와 샌드위치)도 기억에 남는 ‘처음’이다.
그러나 내 인생의 가장 기억에 남는 ‘첫 요리’는 지금의 가정을 꾸리게 해주고, 아버지가 되게 해주었으며, 모자라지만 열심히 살려고 하는 남편이 되게 해준, 나의 아내 김지우에게 처음 해 준 요리다.
바로 Lobster Mac & Cheese(바다가재를 넣어서 만든 마카로니 엔 치즈)다. 비싼 해산물의 대명사인 바다가재와 서양의 라면이나 다름없는 마카로니라는 흔하지 않는 조합의 음식을, 그 당시 만난 지도 얼마 안 된 여배우에게, 레스토랑도 아닌 그녀의 집에서 선보인 날은 아마도 나의 모든 ‘첫 요리’를 통틀어 가장 용감하고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수수하면서도 위트 있어 보이고, 너무 과하지 않게 보이며 흔하지 않은 음식을 찾다가 만들었다’라는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지만 사실은 의도하지 않게 당근과 샐러리가 없었고, 그걸 사러 나갈만한 시간이 없어서 Lobster Bisque(랍스터 크림 스프)가 Lobster Mac & Cheese가 된 것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만족했고 우리가 함께한 첫 요리는 성공적이었다.
사실 오늘 말하고 싶은 건 다른 게 아니다. 태어난 지 160일이 겨우 지난 딸아이가 어제부터 이유식을 시작했다. 그 소금기 하나 없는 無味의 이유식을 처음 접하며 놀라는 표정을 짓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 저 아이가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게 될텐데 이유식 만으로도 저리 놀랄까’하고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이란 단어가 얼마나 큰 영향력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다가 써내려 간 글이다.
한국 나이 마흔 하나. 아직도 젊디 젊은 나에게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처음’이란 단어가 올까. 또 그 많은 ‘처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여러분 각자의 ‘처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건 간에, 행복하고 기억에 남는 좋은 ‘처음’을 많이 만들어가길 기원한다.
요리사 ▶ 레이먼 김 '포스트 Eat'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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